[너섬情談-이경훈] 골목의 힘 기사의 사진
터키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은 한때 건축학도였다. 그래서인지 자전적 에세이에서 그리는 이스탄불은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터키의 얼룩진 역사에서 묻어나오는 도시를 어루만지며 비애와 환희가 묻어나는 공간을 투시도처럼 그린다. 묘사가 더욱 생생해지는 건 빵집, 사진관, 문방구, 철공소, 옷가게같이 골목에 늘어선 상점들을 호명하는 장면이다.

마치 저자를 따라 걷는 듯 어릴 적 나의 골목에 펼쳐졌던 가게들과 공터와 모퉁이 같은 기억이 한 움큼씩 떠오른다. 볼거리가 그득한 어릴 적 골목은 놀이터이자 경기장이며 학교이고 커뮤니티센터였다. 삶의 배경이며 추억의 장소이며 교류의 공간이며 상업 활동의 인프라였던 골목이 위기다. 위기는 전 세계적인데 그 대부분은 대형마트와 쇼핑몰이 골목의 가게들을 빼앗아가며 시작되었다.

2차대전 후 도시 인구가 급하게 늘면서 미국의 중산층은 대거 교외로 빠져나갔다. 애초부터 아메리칸드림이란 게 고향인 유럽 도시의 불결함과 혼잡을 벗어나 한적한 전원에서의 삶을 의미하기는 했지만 자동차 보급이 결정적이었다. 자동차를 소유할 수 없는 저소득층은 자연스레 배제되었고 잔디가 푸르른 주택단지와 광활한 주차장을 갖춘 쇼핑몰로 미국식 유토피아가 완성됐다. 쇼핑몰은 단순히 상점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었다. 작은 상점들을 흩뿌려놓아 골목을 만드는가 하면 큰 건물의 실내에 상점들을 채우더라도 가로등이나 벤치 같은 시설물을 넣고 복도와 아트리움은 도시의 거리나 광장처럼 구성한다. 한적한 전원의 삶에서 소통과 교류의 공간은 더욱 필요한 법이어서 일종의 가짜 마을과 골목을 만드는 건축적 문법으로 도심을 재현했다. 이 때문에 정작 원래의 도심은 텅 비게 되어 여러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이러니다. 미국식 유토피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지만 전통도심이 발달한 유럽보다는 제3세계 국가에서 쇼핑몰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쇼핑몰의 재현적이며 모방적인 특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온 세상을 녹지와 주차장으로 바꾸어버릴 기세였던 쇼핑몰이 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 90년대 미국에서만 매년 100여개가 새로 생겨나던 쇼핑몰이 2007년에 이르러서는 성장을 멈추었고 이제는 미국 전체 쇼핑몰의 23%가량이 빈 가게이며 점점 늘어가는 추세다. 미국 전체 1300여개 쇼핑몰 중 200여개가 폐쇄 직전 단계에 있다는 통계도 있을 정도다. 쇼핑몰의 쇠퇴는 중산층의 감소도 큰 이유이지만 무엇보다 전자상거래를 통한 온라인 쇼핑몰이 치명적이다. 도심을 재현한 쇼핑몰이 도심을 망가뜨리고 쇼핑몰을 재현한 온라인 쇼핑이 그 원본을 위협하는 현상은 이중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미국식 쇼핑몰과 인터넷 쇼핑몰이 거의 동시에 침범한 한국의 골목이 이중으로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인터넷을 통한 소통과 교류가 활발해 보이지만 이 또한 가상의 것이며 개인의 소외와 고립이 심화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다시 도시의 골목이다. 미국의 교외화 현상을 연구하는 도시학자 제프 스펙은 저서 ‘걸을 만한 도시’에서 녹지가 우거진 교외에서 집과 쇼핑몰을 자동차로 오가는 주거 형태는 잘못된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대신에 이상적인 정주공간의 조건으로 유용하고 안전하며 편안할 것 그리고 흥미로운 볼거리가 있는 걷는 공간을 꼽는다. 한적한 교외의 삶이 지속적으로 안전하거나 흥미로울 리 없으며 상가를 따라 걷는 보행자가 넘치는 활기찬 도심이 미국을 구원한다고 단언한다.

마찬가지로 골목이 우리를 구원한다. 서점과 공방과 작은 가게들이 들어선 골목은 상업적 유용함뿐 아니라 교류의 공간이라는 정서적, 사회적 측면 또한 크기 때문이다.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 수도권 주변의 그린벨트에 신도시를 만드는 방안은 미국식 교외주거단지를 만드는 발상이다. 그보다는 도심의 밀도를 높여 기존 인프라를 활용하고 커뮤니티의 회복을 지지하는 이유는 도시와 골목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파묵은 말한다. “불행이란 자신과 도시를 혐오하는 것이다.”

이경훈(국민대 교수·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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