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김찬희] 관성의 법칙 기사의 사진
올해만큼 힘든 적이 없다고 했다.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지천명이 되는 A씨는 몇 해 전만 해도 꽤 벌이가 괜찮았다. 대형 조선업체에서 명예퇴직을 하면서 두둑하게 퇴직금을 챙겼다. 그동안 모은 돈을 보태 울산시내에 아내 앞으로 가게를 하나 냈다. 자신은 협력업체로 옮겨 같은 일을 했다. 월급은 줄었지만 아내 가게에서 나오는 수익과 합치면 전보다 벌이가 더 좋았다. “그런데, 한순간이었다.” 다니는 회사는 점점 일감이 줄더니 인력 감축도 모자라 공장을 놀린다. 아내 가게는 치솟는 임대료와 인건비, 그에 반비례해 갈수록 주는 수입을 감당 못해 일찌감치 폐업했다. 일거리를 찾기 어려워 고향인 부산으로 되돌아갔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아파트 평수를 줄이고 생활비를 아끼며 버티는 중이다. 대학생 외아들은 휴학하고 학비를 벌고 있다. 그는 느는 건 한숨뿐이라고 한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공사장 일용직 일감도 잡기 쉽지 않다.”

지역경제는 많이 아프다. 불황은 소리 없이, 하지만 차근차근 발목부터 허리까지 차올랐다. 지역경제의 ‘등뼈’를 이루는 주력 제조업의 위기는 협력업체를 옥죈다. 공장에 기대 살던 이들은 일자리를 잃고 삶의 터전을 떠난다. 이게 끝이 아니다. 등뼈에 의지하던 음식점, 동네슈퍼, 쇼핑몰, 커피숍도 거센 바람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지금이 바닥인지, 어디까지 떨어져야 바닥인지 알 수 없다. ‘경기’라는 자동차는 멈추지 않고 불황의 터널로 질주한다. 관성(慣性)에 따라.

미적분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정립한 아이작 뉴턴은 물리학 분야에서 역학(力學)이라는 골격을 세웠다. 역학에서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뉴턴의 운동법칙 중 첫 번째는 ‘관성의 법칙’이다. 물체에 가해지는 외부 힘이 0일 때 자신의 운동 상태를 지속하는 성질이 관성이다. 15년 동안 정부의 산업정책은 관성을 유지해 왔다. 정권마다 의욕적으로 내놓는 신(新)성장동력은 이름만 다를 뿐이다. 노무현정부의 ‘차세대 성장동력’(10개 분야), 이명박정부의 ‘신성장동력’(17개 분야), 박근혜정부의 ‘미래성장동력’(19개 분야), 그리고 문재인정부의 핵심 선도사업(8개 분야)은 사실상 닮은꼴이다. 지능형 로봇, 미래형 자동차(그린카, 지능형 자동차, 스마트 자동차, 자율주행차), 차세대 반도체(지능형 반도체), 바이오 신약(바이오 제약·의료기기, 맞춤형 웰니스 케어), 차세대 전지(신재생에너지) 등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가 수두룩하다.

일관성 있게 이런 분야에 정부 재원을 투자하고 연구·개발(R&D)을 주도했다면 반가운 일인데,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다. 민간기업이라고 다르지 않다. 민관이 함께 투자 부족, 신기술 부족, 연구·개발 부족이라는 관성을 유지해 왔다. 지금 한국 제조업이 직면한 침체와 위기의 뿌리는 여기에 있다.

우리와 달리 세계 각국과 주요 기업들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산업체질 전환에 주력했다. 기술이 시장을 만들고, 시장이 기업을 키우는 새로운 방정식에 일찍 눈을 떴다. 정부가 나서서 시장을 만들어주고, 그 시장에서 자라날 기업을 키운다. 중국은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하는 하나의 거대한 모바일 시장을 구축했다. 여기에서 이른바 ‘A(인공지능·AI) B(빅데이터) C(클라우드) D(드론)’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추락하는 지역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고, 사라지는 일자리를 늘리며, 식어가는 경제 엔진을 돌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정부 예산으로 연명하며 관성을 유지할 수도 있다. 다만 관성은 결국 벽에 부딪힌다. 투수가 힘차게 던진 공은 앞으로만 나가려는 관성을 지닌다. 하지만 공을 아래로 당기는 중력, 공을 뒤로 미는 공기의 마찰력이 차츰 힘을 뺀다. 어느 순간 공은 멈추고 땅으로 떨어진다. ‘알맹이 있는 정책’ ‘소통과 현장’을 내건 홍남기 경제부총리의 실용주의가 관성을 깨는 첫 단추가 되길 기대한다.

김찬희 경제부장 c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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