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라동철] 침묵의 살인자 기사의 사진
은밀하게 다가와 목숨을 앗아가는 존재를 ‘침묵의 살인자’라고 부른다. 뇌졸중 고혈압처럼 이렇다 할 증상이 없다가 갑자기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들에 붙어 있다. 단열재 보온재 등 주로 건축자재로 쓰이는 1급 발암물질인 석면, 연중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불청객 미세먼지, 폐암 등을 유발하는 담배도 이런 달갑지 않은 별칭을 갖고 있다.

다들 그럴듯한 이유를 갖고 있지만 침묵의 살인자의 대표주자는 일산화탄소라고 할 수 있다. LPG 등유 연탄 목재 등 탄소가 포함된 물질이 불완전 연소돼 발생하는 이 물질은 색도, 냄새도, 맛도, 자극성도 없는 그야말로 은밀한 존재로 많이 흡입하면 치명적이다. 일산화탄소는 혈액 속 적혈구의 헤모글로빈과 산소보다 250배나 쉽게 결합하는 성질이 있어 헤모글로빈이 산소를 인체 곳곳으로 실어 나르는 것을 방해한다. 일산화탄소를 고농도로 흡입하면 산소를 많이 필요로 하는 뇌 심장 근육 등의 기능이 떨어지고 방치하면 결국 호흡마비로 질식사에 이른다.

일산화탄소 중독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건 연탄이었다. 1970~80년대 연탄이 취사·난방의 주연료로 광범위하게 사용되면서 전국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목숨을 잃거나 식물인간이 되는 이들이 속출했다. 겨울철엔 ‘연탄가스 중독으로 일가족 몰살’이란 뉴스가 신문이나 방송의 단골 기사였을 정도다.

일산화탄소를 흡입하면 두통, 어지럼증, 구역질 증상이 나타난다. 정신은 멀쩡하지만 팔다리가 풀려 균형을 잡기 어렵다. 이때 이상징후를 알아차리고 환기를 하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잠들었을 때는 속수무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깊이 잠들면 증상에 둔감하기 때문에 서서히 혼수상태에 빠져들어 결국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다. 요즘은 연탄 사용이 줄고 보일러가 도입돼 연탄가스 중독 사고는 드물지만 종종 도시가스나 난방유 등으로 인한 사고가 발생한다.

수능시험을 마친 서울의 고교 3학년 학생 10명이 지난 18일 강릉의 한 펜션에 투숙했다가 일산화탄소에 중독돼 3명이 숨지고 나머지는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발견됐다. 보일러와 연통 사이 벌어진 틈으로 새어나온 일산화탄소가 잠든 학생들을 덮친 것이다. 가스누출 경보기만 설치돼 있었으면 피할 수도 있는 참사였다. 이번에도 안전불감증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침묵의 살인자의 먹잇감이 됐다.

라동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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