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용만 (2) 지주집 아들이라 출신성분 나쁘다며 차별

富農 아버지, 머슴과도 허물없이 지내… 北, 토지개혁한다며 토지 몰수 인민군 징집 피하기 위해 온갖 노력

[역경의 열매] 이용만 (2) 지주집 아들이라 출신성분 나쁘다며 차별 기사의 사진
이용만 장로가 풍요로웠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그려본 고향집 모습.
나의 아버지 이봉준은 1892년생으로 자수성가한 부농(富農)이었다. 강원도 평강군에서 젊은 시절 송아지 한 마리로 시작해 1940년대에는 황소 1쌍, 말 1마리, 염소 4마리, 토끼 10마리, 돼지 30마리, 양 120마리, 닭 500마리를 키우는 농장을 일궈냈다. 가축들이 겨우내 추위를 덜 타라고 볏짚이나 마른풀을 깔아주는데 여기 쌓이는 대소변으로 양질의 퇴비를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 토지가 비옥해 남들보다 산출이 좋았다. 일제 강점기 퇴비 증산자에게 주는 상을 도맡아 받았다. 부지런함이 몸에 밴 분이었다.

부친은 부농이었지만 동네사람들에게 인색하지 않았다. 마을을 대표하는 구장 일을 오래 보셨다. 머슴이 새로 들어와서 일을 시작하는 날이면 아버지는 그들을 붙잡고 대청마루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빈부귀천은 물레바퀴 돌 듯 하는 것이니 지금은 자네가 우리 집에서 밥을 먹지만 언제 내가 자네 집 신세를 지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가족처럼 허물없이 지내세.”

풍요롭던 어린 시절이 기억에서 사라질까봐 나는 고향집 그림을 그려 봤다. 아버지 말씀대로 빈부귀천은 물레바퀴 돌 듯 했다. 1946년 북한 정부는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에 따라 토지개혁을 강행했다. 5정보(약 5만㎡) 이상 소유한 조선인 지주는 스스로 경작하지 않는 토지를 몰수당했다.

무상몰수는 맞는데 무상분배는 아니었다. 거둬들인 토지는 국가가 소유했고 개인에게 소유권을 온전히 이전하지 않았다. 농사지을 권리만 개인에게 줬고 자기 땅처럼 사고파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다. 북한 농민들은 소출의 25%를 현물세로 국가에 바쳤다. 일종의 국가주도형 소작제도다. 이걸 무상분배라고 포장했다. 제도개혁의 미명 아래 현대판 농노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부친은 결국 나의 교육 문제를 고려해 이주를 결정했다. 나는 평강고급중학교 1학년이던 1947년 최우등생이 됐다. 당시 평양에서 전국최우등생회의가 열렸는데 학교에선 차점자인 마부 아들을 보냈다. 내가 지주집 아들이어서 출신성분이 나쁘다고 했다. 결국 38선과 좀 더 가까운 강원도 김화군 생창리 큰아버지댁 인근으로 온 가족이 이주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5개월 전이었다.

북한에서 아버지는 나의 인민군 징집을 피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셨다. 남침을 위한 북한 정권의 준비는 착착 진행 중이었고 당시 고급중학교 학생들에게도 신체검사 명령이 떨어졌다. 부친이 시키는 대로 남한에 친인척이 있다고 둘러댔다. 피마자기름 들기름 콩기름 등 온갖 기름을 마시고 설사약도 치사량 가까이 먹었다. 이런 내가 전쟁 와중에 부모를 잃고 남한에 내려와서는 거꾸로 국군에 자원입대했다. 나이가 어려 징병 대상이 아니었는데도 손을 들고 “갑종 합격입니다”라고 외치며 기지를 발휘해 입대했다.

내가 명예장로로 봉직한 서울 온누리교회에 ‘아버지학교’가 있다. 그곳에서 부친에게 편지를 쓰는데 나보고 읽어보라고 하자 교실이 숙연해졌다. “아버지, 저 그래도 열심히 살았어요. 혼자 남한에 넘어와서 어렵게 대학도 다녔고요. 가정을 이루고 남부럽지 않게 공직생활도 했고요. 은행장 경험도 했어요. 전쟁 중에는 적탄에 맞는 등 사선을 넘나들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셨어요.”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의 ‘역경의 열매’ 회고록은 공병호경영연구소 공병호 소장의 저작물(이용만 평전-모진 시련을 딛고 일어선 인생 이야기, 21세기북스, 2017)을 바탕으로 추가 취재를 통해 작성된 것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만 평전’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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