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용만 (3) 공비 수색 나선 아들 붙잡고 찰떡 먹이던 어머니는…

1950년 김화군 학도대 지원 ‘다녀오겠다'는 말이 마지막 인사… 17세에 고향 떠나 혈혈단신 월남

[역경의 열매] 이용만 (3) 공비 수색 나선 아들 붙잡고 찰떡 먹이던 어머니는… 기사의 사진
1951년 군복 차림으로 포즈를 취한 이용만 장로. 남한에 내려와 처음 찍은 사진이다.
“배고프지? 잠시 기다려라. 떡을 구워줄 테니 먹고 가려무나.”

어머니는 콩고물을 버무린 찰떡 3개를 구워주셨다. 나는 부엌에 서서 얼른 먹고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한 뒤 집을 떠났다. 그것이 어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나는 지금도 길을 걷다가 콩고물 떡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1950년 10월이었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강원도 김화군에선 인민군이 패퇴하고 국군과 연합군이 밀고 올라왔다. 국군의 북진이 워낙 빨라서 김화군과 강원도 일대 산악지대엔 주력 부대를 따라가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들이 아군을 불시에 습격하는 일이 잦았다. 인민군 징집을 피한 나는 국군이 북진한 뒤 동네 치안을 위해 학생들로 구성된 학도대에 들어갔다. 학도대원 30여명과 함께 김화 북쪽 금성 방면으로 공비를 수색하라는 명령을 받고 잠깐 집에 들렀다. 곧 돌아오겠다고 인사하는데 어머니가 굳이 붙잡고 떡을 먹고 가라 하셨다. 3개의 떡은 어머니가 해주신 마지막 음식이었다.

금성에서 김화로 돌아오니 마을이 쥐죽은 듯 조용했다.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전혀 나지 않았다. 시내를 지날 때 ‘드르륵’하고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우리를 인민군으로 착각했나 싶어서 “학도대, 학도대”라고 외쳤는데 총을 더 강하게 쏴댔다. 하루 사이 인민군이 다시 김화 시내를 장악한 것이다. 우리가 보낸 척후병 2명은 즉시 체포돼 총살당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부모님이 계신 집을 300m 앞에 두고 눈물을 흩뿌리며 남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당시 학도대를 이끈 사람은 소위 출신이었는데 미리 서울로 월남한 사람이었다. 그의 인솔로 인민군의 포위 공격을 뚫고 산길을 통해 서울로 향했다. 경기도 포천에 이르러 치안대에 무기를 반납하고 포천 일동중학교 건물에 있던 피란민수용소에 들어갔다. 내 나이 만 17세에 고향을 떠나 단신으로 월남한 것이다.

학도대원 대부분은 가족과 재회했다. 김화 사람들 다수는 인민군 패잔병이 시내를 점령하기 전에 피란길에 올랐다. 우리 가족은 그렇지 못했다. 어머니는 “승만(당시 내 이름)이만 남겨두고 우리만 떠날 수 없다”고 반대하셨다. 나를 기다리다 가족이 미처 피란길에 오르지 못한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집을 떠난 후 미군 폭격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1896년생이니 만 54세였다. 훗날 수소문 끝에 찾아낸 앞집 옹기장사 아주머니가 전한 이야기다. 아버지는 폭탄이 한 번 떨어진 곳은 재차 폭격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폭격으로 불탄 큰아버지댁에 철도 침목용 목재를 구해와 튼튼한 방공호를 지었다. 하지만 융단 폭격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어머니와 동생은 폭격으로 방공호가 무너지며 참변을 당했다. 아버지는 마침 인민군 노력동원에 끌려가 목숨은 구했지만 폭격 직후 돌아와 방공호의 흙을 손수 파내 시신을 수습했다고 들었다. 이후 부친의 생사는 확인하지 못했다.

옛날 우리 집엔 양이 많았다. 어머니는 보드라운 양털을 물레에 돌려 두둠한 양털 스웨터를 만들어 주셨다. 그 옷으로 포천중 피난민수용소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대구까지 행군을 해내며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을 버텼다. 1950년 12월 30일 밤 12시쯤 대구로 와서 만 17세 나이로 국군 신병 훈련소에 입대했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의 ‘역경의 열매’ 회고록은 공병호경영연구소 공병호 소장의 저작물(이용만 평전-모진 시련을 딛고 일어선 인생 이야기, 21세기북스, 2017)을 바탕으로 추가 취재를 통해 작성된 것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만 평전’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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