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용만 (4) 총 맞고 위기일발… 한·미 전우 도움으로 목숨 건져

美 2사단 배치돼 국군 부대서 활동… 춘천 가리산에서 인민군 공격 받아 김창조 소대장·미군 4명이 은인

[역경의 열매] 이용만 (4) 총 맞고 위기일발… 한·미 전우 도움으로 목숨 건져 기사의 사진
1951년 5월 11일 강원도 춘천 가리산 전투에서 나의 생명을 구해준 김창조 소대장(왼쪽 세 번째).
어디든 살길은 있었고 무엇이든 자기 하기 나름이었다. 1951년 1월 대구 육군훈련소를 그런 생각으로 이겨냈다. 기상나팔이 울리기 30분 전에 일어나 취사반에서 장작을 한 아름 옮겨준 뒤 누룽지를 얻어왔다. 안주머니를 비롯해 쑤셔 넣을 수 있는 모든 곳을 누룽지로 꽉꽉 채웠다.




보충대 훈련은 늘 배고픔이 함께했다. 전방에서 보충병을 뽑으러 오면 먼저 가겠다고 손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총에 맞는 두려움보다 당장의 배고픔이 더 큰 고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군 GMC 트럭이 도착해 “중학교 이상 재학했거나 졸업한 사람 손들어”라고 외쳤다. 얼른 손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즉석에서 100여명이 모여 3개 소대로 1개 중대를 편성하고 중대장 소대장 선임하사가 배치됐다. 경북 상주를 거쳐 최전방인 강원도 횡성으로 이동했다. 미 2사단 38연대 록 레인저 수색중대에 배치돼 적을 유인하는 국군 부대에서 활동했다. 횡성으로 가는 트럭 안에서 전우들과 누룽지를 아낌없이 나눠 먹었다.

51년 5월 11일을 잊을 수 없다. 강원도 춘천 가리산 전투 때다. 능선을 따라 걸어가는데 인민군이 남긴 옷가지와 불붙은 담배꽁초가 보였다. 급하게 도망갔구나 생각할 무렵 산 위 쪽에서 기관총 공격이 시작됐다. 드르럭 드르럭 소리가 귓전을 진동하고 흙먼지가 일었다. 실탄 300발을 몸에 걸치고 있던 나는 총열이 과열돼 소총에서 연기가 날 때까지 사격하다가 총열을 식히느라 잠시 물러섰다. 그때 갑자기 왼쪽 어깨를 도끼 같은 것으로 내려치는 통증이 느껴졌다. 몸이 왼쪽으로 뒤틀려 몇 바퀴 구르다가 불타다 만 나무 등걸에 몸이 걸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래쪽은 천길 낭떠러지였다. 화강암 절벽 끝 나무에 걸리지 않았다면 시신조차 찾을 수 없을 뻔했다.

총에 맞았으니 바로 죽을 줄 알았다. 정신이 몽롱해졌지만 전우라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일어서서 피신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인민군 총알은 계속 내 옆으로 드르륵 먼지를 내며 땅을 때렸다. 그때 김창조 소대장이 한달음에 달려와 나를 어깨에 끼고 바위 뒤로 옮겼다. “임마, 남자가 총 한 발 맞고 뭘 그래. 나는 총알을 여덟 발이나 맞고도 살았어.” 그 말이 잊히지 않는다.

당시엔 몰랐지만 척추에도 역시 총알을 맞았다. 정밀 수술이 불가능한 야전병원 환경 탓인지 이건 빼내지 못해 여전히 몸속에 남아 있다. 지금도 전신마비 우려 때문에 수술하지 못한다.

총에 맞았을 때 매일 밤 나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준 이언상 전우가 생각났다. 총탄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달려온 김 소대장 역시 벌집이 되기 직전의 나를 구했다. 미군 4명은 가리산의 저 험한 계곡에서 들것으로 나를 후방까지 나르며 페니실린 주사를 놓고 물도 먹여 주었다. 이들 덕분에 나는 목숨을 건졌다.

김 소대장은 훗날 중령으로 전역한 뒤 주택은행에 다녔다. 내가 재무부 이재국장으로 있을 때 알게 돼 여러모로 도왔다. 위생병이 포함된 미군 4명은 끝까지 찾지 못했다. 재무부 장관 시절 미 8군 사령관을 통해 수소문했으나 이어진 중공군 기습 때 전사했을 것이란 답을 받았다. 나는 그들을 기억하며 2014년 서울 마포구 스탠포드호텔에서 미 8군을 초청해 추수감사절 만찬을 함께했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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