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정승훈] 지금 해야 할 일 기사의 사진
출퇴근길에 지나는 한 아파트 단지와 초등학교 사이의 담벼락에 플래카드가 하나 걸려 있다. ‘다목적체육관 건립 위치 변경하라. 단지 정문 옆 공사 절대 반대’. 이 초등학교는 체육관이 없다. 미세먼지 주의보가 일상이 된 요즘 이 학교 학생들은 체육시간에 교실에서 피구 놀이를 한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은 운동장에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앉아서 하다 보니 공에 얼굴을 맞는 경우가 많아 일부 아이들은 무서워한다. 체육은 학생들에게 반갑지 않은 수업이 됐다.

이 단지 아파트는 인근 단지보다 값이 비싸다. 주변의 같은 평수 아파트보다 수천만원 더 시세가 높다. 단지와 붙어 있는 초등학교의 존재가 적지 않은 지분을 차지한다. 이 단지에도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를 둔 집이 꽤 많을 텐데 입주자대표회의 명의의 플래카드는 몇 달째 걸려 있다. 이 단지에 사는 초등학교 학부모들은 아이의 체육시간엔 관심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 정도는 감수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해당 초등학교는 체육관 건립 예산을 확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인근 단지 주민들의 반대 탓에 공사를 시작도 못하고 있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학교장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싫어한다는 소문도 돈다. 재임 중 체육관을 건립했다는 치적을 남기기보다는 그저 퇴임 전까지 피곤한 일이 없었으면 한다고 학부모들은 흉을 본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 학교 어린이들은 교실에서 체육 시간을 보낸다.

선출직으로 주민들의 ‘표’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지자체장들도 비슷한 상황을 겪는다. 자칫 사업을 잘못 벌였다가는 치적으로 인정받기는커녕 오히려 표만 날리게 된다. 복지부동이라며 공무원 질타에 앞장섰던 의원 출신들 상당수가 막상 사업을 집행하는 입장이 되면 소극적으로 변하는 이유다.

서울 은평구는 진관동 지역에 재활용품을 선별해 처리하는 자원순환센터 건립을 추진 중이다. 기피시설이다 보니 인근 은평뉴타운 주민은 물론 인접한 경기도 고양시 주민까지 나서서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들은 이미 다른 소각시설이 진관동에 있는데 이 지역에 또 다른 폐기물 처리시설을 짓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지난 6월 민선 7기로 첫 임기를 시작한 김미경 은평구청장은 거센 반대 목소리에도 설득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재선과 3선의 기회가 남아 있는 선출직 구청장이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를 마주한 채 재활용처리시설 건립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이다.

김 구청장이 건립을 추진하는 이유는 은평구의 자체 폐기물 자립도가 34%에 불과한 데다 지금이 건립 적기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은평구는 인접 자치구인 마포구(생활폐기물 소각), 서대문구(음식물폐기물 처리)와 함께 협력 체계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각 구에 다른 시설을 하나씩 건립해 3개 구의 폐기물을 공동 처리할 수 있도록 한다는 복안이다. 협력 체계가 물거품이 되면 은평구는 3종류의 폐기물 처리 시설을 모두 세워 자체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김 구청장은 장애인복지관 추가 건립도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도 건립 예정지 인근 주민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다. 며칠 전 만난 김 구청장에게 자원순환센터와 장애인복지관 건립을 밀어붙이는 이유를 물었더니 “지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자원순환센터는 오래전부터 은평구의 당면과제였지만 예산과 주민 반대 등의 이유로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그는 “자원순환센터든 장애인복지관이든 해야 할 때 못하고 미루면 나중에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했다.

반대 주민들의 주장처럼 구가 선정한 건립 후보지가 최적지가 아닐 수도 있다. 김 구청장의 사업 추진방식보다 더 합리적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와 헤어진 후에도 “일이란 건 해야 할 때가 있다”는 얘기만큼은 계속 되뇌어졌다. 퇴근하는 길 담벼락의 플래카드를 쳐다보다 문득 교실에서 피구하는 초등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승훈 사회2 부장 s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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