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용만 (5) 명예 제대 후 대학 합격했으나 돈 없어 등록 못해

주경야독으로 5대 1 경쟁 성대 합격 명예 제대 군인 학비 면제는 말뿐 하지만 배움 이어가 고려대 편입

[역경의 열매] 이용만 (5) 명예 제대 후 대학 합격했으나 돈 없어 등록 못해 기사의 사진
이용만 장로의 척추 좌측에 박힌 인민군 총알(점선 원내). 1951년 왼쪽 어깨 총상 당시엔 몰랐고 20년쯤 지나 재무부 이재국장 시절 발견했다. 2014년 촬영한 엑스레이 사진.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

이 명언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51년 5월 강원도 춘천 가리산 전투에서 총상을 입은 나는 미군 수송기에 실려 부산 15육군병원으로 이송됐다. 총상을 입은 왼쪽 어깨엔 깁스를 했다. 나중에 척추에도 인민군 총알이 박혀 있는 걸 발견했지만 이때는 몰랐다.

병원에는 쉴 새 없이 부상 장병이 몰려들었다. 깁스를 푼 직후 병원 마당에서 배구를 하기 위해 팔을 들어 올렸지만 왼쪽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지금도 똑바로 서면 왼쪽 어깨가 더 낮다. ‘장애인이 됐구나’란 생각이 들어 낙담하기도 했지만 열심히 재활 훈련을 했다.

사실 부상보다 앞으로 살 길이 더 막막했다. 부대가 내 집이었고 전우가 내 가족이었다. 51년 9월 명예 제대를 한 후에도 갈 곳이 없어 중대장의 허락을 받아 잠시 보급중대에서 군인들과 같이 군복무를 했다. 그러다 경기도 수원에서 우연히 고향 후배를 만났는데 나의 6촌 형님이 대전에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북에 있을 때 아버지는 “사람은 배워야 하고 배움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혈혈단신으로 바닥에서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배워야 했다. 대전에서 만난 6촌 형님 이승선은 개성 송도고보 출신으로 당시 대전체신청 인사계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형님의 배려로 대전우체국 서무과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대학입학을 준비하는 생활에 돌입했다.

영어는 퇴근 후 학원을 다니며 공부했고 수학은 입시문제집을 사서 공부했다. 때마침 명예 제대한 상이군인에게는 학비를 면제해준다는 병무청 고시가 발표됐다. 북에서의 바람대로 이공계 진학을 위해 성균관대 화학과 시험을 보았고 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대학 등록을 위해 당시 부산에 있던 성대 대학본부로 향했다. 일반석 차표를 살 형편이 못돼 대전발 부산행 야간 화물열차에 몸을 실었다. 부산에서 고향 친구 김해영을 만나 동대신동 성균관대에 가자고 했다. 친구와 함께 대학본부에 합격증을 내니 등록을 위해선 돈을 내라고 했다. 내가 “저는 돈이 없어요”라며 병무청 고시를 언급하자 “무료는 아니다. 50% 감면이다”란 답이 돌아왔다. 극심한 재정난에 명예 제대 군인을 위한 학비 지원 제도가 부실하게 운영됐던 것이다. 50%는커녕 10%의 등록금도 낼 돈이 없던 나는 낙담했다. 마침 그날이 합격자 등록 마감 전날이라 대학본부 밖에는 돈을 싸들고 와서 미등록자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밤늦게 대전으로 올라오는 화물차에 가마니를 깔고 누웠다. 얼마나 서럽던지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래도 배움의 꿈을 놓지 않았다. 서울이 수복되고 난 다음 6촌 형님 가족들은 서울로 올라왔고 나는 1년여간 홀로 대전에서 자취를 하다 다시 한 번 형님 댁에 신세를 졌다. 서울 종로구 연지동 체신청 관사에 입주한 형님네 앞마당 연탄창고를 방으로 꾸며 기거했다. 우체국에 다니며 100% 야간 학과만 있던 한국대학(현 서경대학)에 합격했다. 역시 학비가 없어 등록은 않고 1년 가까이 청강만 했다. 이후 성균관대 법과대학을 1년 다녔고 다시 시험을 봐서 고려대 법대 행정학과 55학번으로 편입했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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