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용만 (6) 겨울에는 백열전구에 손 녹이며 책 읽어

고려대 들어가서도 일하면서 공부, 국제우체국 번역 일 돕다가 행운… 美 우표 수집상과 거래 큰 돈 벌어

[역경의 열매] 이용만 (6) 겨울에는 백열전구에 손 녹이며 책 읽어 기사의 사진
1957년 고려대 교정에서 친구들과 함께한 이용만 장로(왼쪽).
고려대에 들어간 후에도 일하며 공부하는 생활이 계속됐다. 나 혼자 모든 것을 다 해결해야 했기에 남보다 조금이라도 다르게 해야 했다. 똑같이 하면 뒤쳐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부지런함을 물려받았다. 이남으로 내려오면서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게 됐지만 항상 아버지의 바람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염원이 있었다. 아버지가 북에서 보여준 교육열을 떠올리며 척박한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대학에 가자고 결심했다. 추운 겨울 연탄창고를 개조한 방에서 이불 속에 들어가 백열전구로 몸을 덥히며 책을 봤다.



중앙우체국에서 국제우체국으로 자리를 옮겨 간단한 번역 업무를 했다. 국제우체국은 주야 교대로 일을 해야 했는데 가족이 없는 나는 국제우체국 숙직실을 집으로 삼아 남의 숙직을 도맡아 했다. 다른 직원들은 숙직을 하지 않아 좋았고 나는 낮에 학교를 다닐 수 있어서 좋았다. 하나씩 하나씩 나만의 성채를 구축해 나갔다.

국제우체국에서 번역 일을 돕다가 행운이 찾아왔다. 당시 우체국에는 미국의 우표 수집가들이 펜팔 상대를 찾기 위해 보낸 편지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우표는 국제통화처럼 투자 대상으로 여겨졌다. 전쟁을 치른 한국의 희귀 우표를 구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세계 우표수집가들이 눈과 귀가 쏠려있던 상황이었다.

나는 번역 업무를 맡다가 미국 우표 수집가들의 편지를 이것저것 읽어보게 됐다. 편지마다 간절하게 한국 우표 수집을 위해 펜팔을 원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들이 편지를 보내 놓고 답장이 없으니 얼마나 맘을 태울까.” 가족이 없어 외로웠던 나는 이들의 애타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임자 없는 편지 가운데 몇 가지를 골라 영어로 답변을 보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편지를 보낸 곳 중에 미국 뉴욕의 전문 우표 수집상 ‘파툴라 앤 라자(Fatoullah and Lazar)’가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취미로 펜팔을 하자는 게 아니고 한국 우표를 지속적으로 보내주길 원했다. 그저 펜팔 상대나 되어 볼까 하는 맘으로 시작했는데 이게 돈벌이 수단이 됐다.

고려대 2학년 때부터 우표 거래를 시작했다. 수집상은 발행이 제한된 기념 소형 시트를 주로 보내달라고 했다. 내가 10센트를 달라고 하자 1달러를 보내줬다. 10배였다. 학교와 중앙우체국에 사서함을 만들어 놓고 시내의 우표상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구하는 것을 말해두면 사람들이 경쟁하듯 나에게 우표를 보내줬다. 가격을 정확하게 지불했고 약속 날짜도 정확하게 지켰다. 그리고 이걸 다시 미국 우표 수집상에게 수출했다. 성실함 근면함 치밀함으로 승부했다. 기념세트 1장 가격이 당시 돈으로 40원이었는데 1달러(당시 500원) 정도를 받고 보냈다. 상당한 돈을 벌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우표를 취미로 수집할 때 나는 사업으로 나선 셈이다. 나는 지금도 한국 제일의 우표 수출업자였다고 자부한다. 이 우표 거래로 대학 등록금을 해결했고 서울에 집을 마련했으며 한때는 뉴욕 수집상의 재정 보증으로 미국 유학까지 꿈꿨다. 우표 수출은 내가 공직에 들어가 청와대 비서실에서 일하게 됐을 때 접었다. 교회 성가대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하면서 미국 유학 꿈 역시 접었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의 ‘역경의 열매’ 회고록은 공병호경영연구소 공병호 소장의 저작물(이용만 평전-모진 시련을 딛고 일어선 인생 이야기, 21세기북스, 2017)을 바탕으로 추가 취재를 통해 작성된 것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만 평전’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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