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루벤스 ‘한복 입은 남자’ 주인공은 조선인 아닌 중국상인 이퐁” 기사의 사진
‘안토니오 코레아’로 불리는 루벤스 소묘 ‘한복 입은 남자’(위쪽·1617년 작). 서양인이 그린 최초의 조선인으로 알려진 이 작품이 네덜란드 베스트스테인 교수에 의해 ‘중국 상인 이퐁(興浦)’임이 밝혀졌다. 그는 이 소묘를 토대로 루벤스가 그린 제단화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아래 왼쪽·1617~18년 작)과 자신이 발굴한 1601년 익명의 작가가 그린 중국인 이퐁 초상화(아래 오른쪽)의 유사성을 들어 이같이 주장했다. 이퐁의 초상화에는 자필 한자로 ‘대명지분 객흥포(大明之焚 客興浦)’라는 국적과 이름이 분명하게 적혀 있다. 베스트스테인 교수 제공

이전이미지다음이미지

지난해 방영된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SBS)에는 미술사의 명작 한 편이 등장한다. 17세기 바로크의 대가 페테르 루벤스(1577~1640)가 그린 ‘한복 입은 남자’ 소묘다. 드라마에선 신사임당을 사랑했던 왕족 이겸이 소년 시절 이탈리아에서 지낼 때 그려진 초상화로 나왔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일명 ‘안토니오 코레아’. 유럽을 방문한 최초의 조선인 청년이다. 특히 거장 루벤스의 모델이 됐다는 서사가 묘한 민족적 자긍심을 불러일으켰던 초상화다. 그동안 소설로, 드라마로, 다큐 등으로 80년 넘게 소비되던 이 신화가 깨졌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대학교 테이스 베스트스테인(사진) 교수가 2016년 현지 학술지 ‘네덜란드미술사연보’에 논문 ‘중국 상인 이퐁 초상화’를 기고해 소묘의 주인공이 조선인이 아니라 명나라 상인 이퐁(Yppong·興浦)이라고 밝혀낸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베스트스테인 교수는 27일 국민일보와 가진 이메일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 있다”면서 “하지만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영화나 소설 속 안토니오 코레아 서사에 더 이상 속지 말라”고 했다.

루벤스가 남긴 소묘의 주인공이 조선인이 된 것은 1934년부터다. 영국 미술사학자 클레어 스튜어트 워틀리가 ‘조선 특유의 투명한 말총 모자’를 내세워 종래의 중국인설을 뒤엎었다. 그림은 83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소묘 작품 사상 최고인 32만4000파운드(4억6100만원)에 낙찰되며 세계적인 화제가 됐다.

‘안토니오 코레아’로 불리게 된 건 역사와 뒤범벅이 돼서다. 원래 안토니오는 실존 인물이다. 정유재란 때 왜구에 납치돼 일본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이탈리아 상인에게 노예로 팔렸다. 그 상인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남긴 자서전 ‘나의 세계 일주기’에 조선인이 로마에서 세례명 안토니오로 산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를 소재로 한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이 93년 출간돼 200만부 이상 팔리기도 했다. 이어 곽차섭 교수가 2004년 연구서 ‘조선 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를 통해 조선인 노예가 루벤스의 모델이 됐다고 주장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2015년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미국 순방 중 그림 소장처인 미국 로스앤젤레스 게티미술관을 방문하며 국민적 관심에 불을 지폈다. 안토니아 코레아 신화에는 애국심 코드가 근저에 흐른다.

베스트스테인 교수는 중국인설을 입증하기 위해 두 개의 새로운 그림을 제시한다. 하나는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 소장품인 루벤스의 제단화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에 등장하는 동양인이다. 다른 하나는 17세기 플랑드르 제란트에 살았던 변호사 니콜라스 드 프리서가 남긴 ‘앨범 아미코룸’(제작 1595~1609·지인들끼리 글과 그림을 모은 당시 유행한 ‘우정의 문집’)에 수록된 중국 상인의 초상화다.

이 두 그림과 기존의 루벤스 소묘는 복장과 포즈, 얼굴 모양이 아주 흡사하다. 루벤스의 소묘는 상단과 하단이 잘려나가 인물이 쓴 모자의 끝부분과 바지 아래 신발이 분명하지 않다. 반면에 익명의 화가가 그린 드 프리서 초상화는 인물이 쓴 모자와 신발까지 완벽하게 표현돼 있다. 초상화 인물의 모자와 신발 등은 루벤스 제단화 속 동양인의 것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베스트스테인 교수는 루벤스가 네덜란드에서 이퐁을 실제로 만나서 그렸을 가능성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루벤스는 이퐁이 도착하기 3주 전에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기 때문이다. 베스트스테인 교수는 “시각적 유사성으로 볼 때 루벤스가 드 프리서 앨범 속 초상화를 참고해 제단화와 소묘를 그렸다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드 프리서 초상화에는 주인공이 한자로 자신을 설명하는 글이 적혀 있다. “내 이름은 ‘이퐁(興浦)’. 중국 명나라 상인이며, (인도네시아) 반탐을 거쳐 (네덜란드) 제란트에 왔고, 반탐을 거쳐 다시 명나라로 간다. 1601년 새해에 제란트에서 쓴다.” 뒷면에는 같은 내용이 라틴어로 설명이 돼 있다. 흥미로운 것은 만다린어로 ‘싱푸(興浦)’로 발음되는 이름을 라틴어로 ‘이퐁(Yppong)’이라고 적었다는 점이다. 베스트스테인 교수는 사투리이거나 네덜란드인이 옮기는 과정에서 일어난 혼선이라고 봤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기록에 따르면 네덜란드에 온 최초의 중국인 ‘인포(Inpo)’가 나온다. 그는 1600년 5월 31일 반탐을 거쳐 플랑드르에 도착했고, 6개월 머물다 귀국했다. 베스트스테인 교수는 여러 요인으로 보건대 ‘인포’와 ‘이퐁’이 동일인이라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루벤스 작품 모델의 조선인설 근거는 소묘에 보이는 겉옷이 철릭(조선시대 무관의 옷)과 유사하고 모자가 네모난 방건과 흡사하다는 이유였다. 이퐁은 “우리는 말총으로 그물처럼 높고 둥근 모자를 쓴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 제단화와 이퐁 초상화 모두 모자 끝이 둥글다.

국내에서도 2015년 미술사학자 노성두 씨가 조선인이 아니라고 반박한 바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를 통해 국적과 이름이 밝혀진 것은 처음이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