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용만 (7) 친어머니 같았던 권사님 덕에 옆길로 새지 않아

친구 어머니인 김병인 권사, 나를 주님께 인도하고 보살펴 주셔…교회에 살다시피하며 외로움 달래

[역경의 열매] 이용만 (7) 친어머니 같았던 권사님 덕에 옆길로 새지 않아 기사의 사진
친구 김해영의 어머니 김병인 권사. 김 권사는 나를 교회로 이끌고 반듯하게 살아가도록 도와주셨다.
나는 전쟁 중에 친어머니를 잃었지만 서울에서 친어머니나 다름없는 교회 권사님을 만나 젊은 날 옆길로 새지 않았다. 나의 제일 친한 친구인 김해영의 어머니 김병인(1909~2008) 권사였다. 나를 주님께 인도한 은인이기도 하다.

김 권사도 나의 고향인 강원도 평강읍 출신이다. 아버지가 말을 타고 읍내에 나갈 때면 자주 그 집에 들렀다. 김 권사의 남편은 해방 후 북에서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는 죄목 때문에 소련으로 끌려가 가족들과 인연이 끊어졌다. 전쟁 통에 김 권사는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데리고 남편 없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혼수품이던 싱거(Singer) 미싱 한 대로 자녀들을 모두 대학까지 마치게 한 분이다.

김 권사는 서울의 을지로 4가에 있던 동광교회에서 봉사하셨다. 친구 김해영이 교회에 매여 있으니 불러내기 위해 드나들다가 나도 열심히 다니게 됐다. 교회에 출석하는 나를 김 권사는 많이 사랑해 주셨다. 김 권사는 나를 볼 때마다 다른 교인들에게 “내 아들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다른 할머니들이 “그 집은 아들이 몇 명인데 그렇게 많으냐”고 묻곤 했다.

젊은 시절은 복음에 빚진 삶이었다. 대학에 다닐 때도 주말이나 주중을 가리지 않고 절반을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전쟁 와중에 홀로 남한에 떠밀리듯 내려와 숱하게 많은 날을 외로움에 지치고 배움을 갈망했다. 그때 교회가 내 가족이 됐다. 요한복음 7장 37~38절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말씀처럼 외로움과 마음의 상처를 교회에서 치유 받았다.

이 교회엔 두 분의 나이 지긋한 권사가 있었는데 한 분은 김 권사이고 다른 한 분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어머니 전인항 권사였다. 두 분 모두 남편 없이 아이들을 홀로 키워냈으며 고향이 이북이어서 친하게 지냈다. 고려대를 다니던 나는 연세대를 다니던 김우중을 교회에서 봤으나 얼굴만 알 뿐 깊은 이야기를 나눌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동광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청년회 회장과 성가대장으로 활동했다. 성가대장으로 있으면서 평생 함께할 반려자를 성가대 반주자로 만난다. 당시 김석홍 담임목사는 나를 친동생처럼 챙겨 줬고 과분할 정도로 위해 줬다. 결혼식 때 가족이 없던 나를 위해 김 목사가 대표로 친족 감사 인사를 했다. 훗날 김 목사가 건국대 교목으로 옮겨가면서 나도 건국대 근처로 거처를 옮기고 화양감리교회에 나가게 됐다.


김 권사는 1969년 이민 간 아들을 따라 미국으로 갔다. 재무부 시절 미국에 출장을 가면 바쁜 일정에도 꼭 시간을 내서 LA에 있는 김 권사를 뵈러 갔다. 찾아 뵐 때마다 김 권사는 우선 성경을 펼쳤다. 그리곤 말씀을 찾아 읽고 기도를 해 주셨다. 미국 출장 일정을 쪼개 갔기에 주변 가족들이 ‘어머니, 형님 바쁜데 이제 그만 하시지요’ 말해도 끝까지 말씀과 기도를 잊지 않았다. 김 권사는 100세를 5개월 앞두고 돌아가셨다. 이후 더 이상 LA에 갈 일이 없어져 너무도 아쉬웠다. 남한에서 혈혈단신 살면서도 생활을 단정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김 권사의 보살핌과 기도의 힘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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