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인 12인 “조선 독립 인정하라” 일제 총독에게 날 선 편지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기독인들의 독립운동 주도 배경

기독인 12인 “조선 독립 인정하라” 일제 총독에게 날 선 편지 기사의 사진
서울 경성부청 앞에 모인 군중이 1919년 3월 1일 만세를 외치고 있다. 이 사진을 회보에 실었던 ‘적십자사’는 “여성과 소녀를 포함한 수천명의 열렬한 조선인들이 손을 들고 만세를 외치고 있다”고 했다. 국민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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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이 3·1운동의 전면에 나선 배경에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이 있었다. 부흥운동은 교세 성장을 이끌었다. 일제가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105인 사건도 독립을 향한 기독인들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이덕주 전 감리교신학대 교수는 “1900년대 초반부터 늘기 시작한 기독교인들이 3·1운동의 불쏘시개가 됐다. 이들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기독교는 1885년 호러스 G 언더우드와 헨리 G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한 뒤 꾸준히 성장했다. 1919년 기독교인의 수는 감리교와 장로교인을 합해 19만명을 웃돌았다. 부흥의 기폭제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었다.

1907년 1월 6일 주일, 평양 장대현교회엔 2000여명의 교인이 모여 들었다. 이들은 자신의 죄를 며칠간 회개했다. 회개운동은 교회의 부흥을 이끌었고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으로 이어졌다.

1907년과 1909년의 괄목할 만한 부흥운동의 끝에 ‘105인 사건’이 있었다.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지역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만든 신민회 안에서 독립운동을 향한 움직임이 빠르게 확산됐다. 이들을 눈엣가시로 여긴 조선총독부는 1911년 군자금을 모금하다 잡힌 ‘안명근 사건’을 날조해 수사를 확대했다. 기독교 민족 운동가들을 뿌리 뽑겠다는 속셈으로 기독교인들을 대거 체포했다.

일제 경찰은 600명 이상을 구속한 뒤 고문해 허위자백을 받았다. 검찰은 123명을 기소했고 재판부는 105인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100년사’가 수사 과정에 사용된 고문 기구만 70종이 넘었다고 기록할 정도로 수사는 잔혹했다. 서북지역 기독교가 궤멸될 수도 있었던 사건이었다.

교인들이 일제의 무단통치 기간에도 이 같은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건 교회라는 활동 무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친일단체인 일진회마저 해산시킬 정도로 조선인들의 정치·사회단체를 없앴지만 교회는 예외였다. 교회의 규모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교회가 미조직 상태였고 기도처도 많았지만 1919년엔 이들 모두 그물망처럼 연결돼 있었다.

최근 조사에선 당시 교회 수가 3200개가 넘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총독부는 식민지 조선 통치를 위해 조선통감부 시절인 1908년부터 1942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사회조사를 실시했다. 총독부가 발간한 통계연보는 ‘사사급교회(社寺及敎會)’라는 항목 아래 한반도에 있던 결사(신사)와 사찰, 교회 현황 조사결과를 수록했다. 1919년 조사에선 일본 신사를 제외하곤 교회의 수가 종교단체 중 가장 많았다.

최상도 호남신대 교수는 1919년 총독부 통계연보를 근거로 “당시 교회와 포교소, 기도처 등이 전국에 3246개소 있었다”면서 “이 중 일본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 제7일안식교회를 빼더라도 2897개의 감리교와 구세군, 장로교 소속 교회들이 전국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다”고 말했다.

천도교의 손병희가 3·1운동을 준비하며 평북 정주의 이승훈 장로를 서울로 초청한 것도 교회가 가진 인프라를 눈여겨봤기 때문이었다. 손병희는 이 장로에게 “자금은 천도교가 부담할 테니 인원 동원은 기독교가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기독교인들은 3·1운동에 대거 참가해 적지 않은 대가를 치렀다. 많은 기독교인이 일경에 검거됐고 일부는 주동자로 간주돼 검찰에 송치됐다. 1919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회 총회 회의록에 피해 사실이 드러나 있다. 당시 총회장이던 김선두 목사부터 ‘조선독립운동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총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총회록에 함께 실린 노회 보고서엔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체포된 이들의 이름과 구속 상황 등도 기록돼 있다. 산서노회는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던 강계읍교회 조사 정준씨와 한시원씨가 총살됐고 중학생 탁창국과 김명하씨는 의주감옥에서 태형 90대를 맞고 선천읍 미동병원에서 치료 중 결국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평북노회도 “만세사건으로 총살당한 교인이 31명이고 부상한 교인도 20여명”이라고 했다.

일제의 탄압과 핍박에도 기독교인들은 굴하지 않았다. 1919년 3월 12일 서울 안동교회 김백원 목사는 이웃한 승동교회 차상진 목사 등과 함께 ‘12인의 장서’를 썼다. 수신자는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총독이었다. “우리는 만강의 충정으로 한 마디를 각하에게 주노라”로 시작하는 편지에선 시종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라”고 다그쳤다. 편지는 이렇게 이어진다. “우리의 독립선언이 어느 곳에 모순이 있으며 무엇이 이치에 어그러짐이 있는가. 이번 거사를 경거망동이라 하지 말라. 일시적 수단으로 무력을 사용한다면 이는 유감이다.” 김 목사와 차 목사는 구속됐다.

3·1운동 당시 기독교가 이처럼 강하게 저항했던 배경에는 비기독교국가인 일제의 식민지였다는 특수성도 작용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홍승표 연구원은 “한국은 ‘천황제’를 숭배하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된 기독교가 저항운동의 강력한 정신적 근거가 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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