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신창호] 침묵하는 다수의 균형감각 기사의 사진
정치학에서 흔히 사용하는 개념이 하나 있다.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라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의사를 표현하지 않는 다수의 대중을 의미하는 말, ‘시끄러운 소수(vocal minority)’, 즉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집단의 반대개념이다. 독재사회에서 침묵하는 소수는 그저 정치적 엘리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존재에 불과했다. 1940년대 독일인들이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행해진 전대미문의 전쟁과 홀로코스트를 수수방관한 걸 떠올려보면 된다.

그런데 침묵하는 다수는 민주주의가 일반화된 사회에선 전혀 다른 형태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다. 정치적으로 평온한 시기엔 ‘있는 듯 없는 듯’하다가 중요한 순간이 되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기 때문이다. 2016년 촛불 사태를 상기해보면 된다.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이 위임된 권한을 넘어섰다고 판단한 순간, 침묵하는 다수는 시끄러운 소수보다 더 시끄럽게, 더 또렷하게 목소리를 질렀다. 그 목소리에 대한민국 정치권력과 정치판의 지형은 바뀌어버렸다.

민주주의 시대의 정치인과 정당은 침묵하는 다수를 움직이기 위해 끊임없이 공세를 펴기 마련이다. 다수, 아니 국민의 대세를 장악하면 권력이 자기네 편으로 옮겨오기 때문이다. 현대정치는 ‘다수를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기 위한 모든 합법적·정치적 방법의 동원’ 쯤으로 요약해도 될 듯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정치가, 정치인과 정당이 습관적으로 잊어버리는 일이 있다. 바로 침묵하는 다수가 어떻게 자기편이 됐는지에 대한 기억이다. 권력을 장악한 정치인과 정당은 “우리가 잘해서 국민이 지지했을 뿐이며 이대로 똑같이만 해나가면 국민은 항상 우리 편일 것”이라고 여긴다. 이런 사고방식의 근저엔 ‘침묵하는 다수는 항상 수동적이고 시끄러운 소수가 제대로 목소리를 내면 그저 따라올 뿐’이란 생각이 깔려 있다.

진짜 침묵하는 다수는 그저 수동적일 뿐일까. 가끔 그럴 때가 많은 건 사실인 듯하다. 정치인들처럼 지나치게 논쟁적이거나, 학자나 다른 전문가들처럼 각종 정보와 지식에 천착하지도 않으니까 말이다. 정치인의 말에 혹하거나 정당의 선전에 쉽게 설득당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자세히 바라보면 ‘침묵하는 다수=수동적인 존재’란 등식은 전혀 성립하지 않는다. 다수는 그들의 집단적 균형감각에 의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데 익숙한 다수는 선거가 다가올 때까지 아무런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다. 마치 동면하는 동물처럼 동굴에 웅크려 잠을 자는 듯해 보이지만, 그들은 항상 깨어 있다.

균형감각이란 어떻게 서 있어야 넘어지지 않고 잘 걸어갈 수 있을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침묵하는 다수의 정치적 균형감각도 이와 비슷하다. 진보와 보수가 항상 뒤엉켜 서로를 겨누는 정치판의 현실을 오랫동안 지켜봐온 그들은 절대 한 편에게만 힘을 몰아주지 않는다. 누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지를 촉수를 곤두세우고 지켜보고 있다. 로마시대 황제 시저에 맞섰던 역사가이자 법률가 키케로의 말처럼 “침묵할 때 그들은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새해가 됐지만 대한민국 정치 일번지 여의도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민간인 사찰·블랙리스트 의혹으로 시끄럽다. 야당은 민간인 사찰과 블랙리스트 작성에 문재인정부도 예외가 아니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여당은 “민정수석실 특검반원 하나가 공식 문건도 아닌 자료를 유출한 범법행위일 뿐”이라고 반격한다. 두 ‘시끄러운 소수’의 목소리를 듣는 한국의 ‘침묵하는 다수’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지. 그들의 정치적 균형감각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여야의 목소리만 듣고 있진 않을 것이다. 지나간 과거를 끄집어내고 앞으로 나아길 길을 전망하면서 촉수를 가다듬고 있을 것이다.

신창호 토요판 팀장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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