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산다] 제주도 소확행 기사의 사진
우리 집에 묵게 된 손님이 나에게 저녁을 같이 먹어줄 수 있냐고 물었다. 소주가 한잔 하고 싶단다. 출판업을 하는 50대 중반의 이 남자는 지난여름 나와 낚시를 같이한 적이 있다. 이날도 일찌감치 숙소에 들어와 짐을 풀고는 낚싯대를 들고 집 앞 걸어가는 거리의 방파제로 갔다. 그 방파제가 고기를 낚았던 좋은 기억이 있는 곳이란다. 이날은 그날의 기억만 하지 못했다. 우리는 근처 식당에 앉아 소주를 따랐다.

이 남자는 어제, 그제 두 차례 한라산 등반을 했다. 첫날은 어리목 코스로, 다음 날은 성판악 코스로 정상을 다녀왔단다. 모두 눈이 쌓여 있었고 힘들었을 터다. 그리고 오늘 걸어서 우리 집까지 왔고 한가하게 낚시를 하고 싶었단다. 낚시 장비는 갖고 오지 않아 가까운 낚시점에서 싸구려를 구입했다. 고기를 잡아도, 못 잡아도 그에게 상관없는 듯 보였다. 그동안 한라산 등반, 자전거 일주 등으로 제주도를 자주 왔는데 최근 흥미를 잃었다가 지난여름 방파제에서 한가하게 낚시를 하며 다시 제주도가 좋아지고 있다고 했다. 제주도를 즐기는 스타일이 변하는 듯하다.

“오늘 낚시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뒤를 돌아보니 노을이 졌어요. 내가 낚싯대를 들고 그 노을을 보며 한가하게 집으로 돌아오고 있어요. 행복했어요.”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기쁨의 빈도가 맞아요. 크게 행복하려 오래 참은 뒤 한번 오는 기쁨이라면 인생이 행복할까요. 오늘 조금 기쁘고 내일 조금 더 기쁘고 그렇게 매일 조금씩 기쁘면 인생이 행복한 것 아닌가요.” “아름다운 것, 기쁜 것을 볼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해요. 그러기 위해 내려놓는다고도 하고 여유를 가진다고도 하죠.” 이날 이 남자의 말에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특히 많았다. 작은 기쁨이 이어지는 것이 행복이라는 철학이다.

이 남자는 떠나며 낚싯대를 방에 두고 갔다. 나는 창고에 보관했다. 다시 오면 이 낚싯대로 또 한가하게 방파제에 앉아 작지만 확실한 행복-소확행을 더 찾아내겠지.

우리 집에 오는 여행객들이 일정을 짜며 나에게 어디를 가면 좋겠냐고 종종 묻는다. 나는 저 앞이 제주도 바다고 저 뒤 돌담 처진 곳이 제주도 밭이라고 일러준다. 바닷가 해녀길을 따라 내려가면 작은 칠게들이 사방으로 놀라 달아나고 갯바위에는 보말과 톳이 잔뜩 붙어있다고 말한다. 아무 마을이나 들어가 골목길을 다니면 돌담 너머 안마당이 보이고 그곳에 제주도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보인다고 가르쳐 준다. 그러고는 여기가 제주도인데 어디를 더 가서 제주도를 찾으려느냐고 되묻는다. 도대체 제주도를 찾아 어디까지 가려 하는 것인지.

지금 여기서 제주도가 보이지 않으면 어디 가서도 제주도가 보이지 않는다. 그 남자처럼 돌아보니 노을이 있었다는 행복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다른 행복도 보이지 않는다. 작은 행복을 볼 줄 모르면 큰 행복이 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모른다. 어쩌면 이미 그곳을 지나치고도 보지 못했는지도.

아침에 마당 청소를 하는데 바다 쪽에서 ‘텅’ ‘텅’ 뭔가가 물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린가 하고 바라보니 돌고래들이 지나가며 솟아올랐다 떨어졌다 하고 있었다. 아침에 마당에 나가면 옆 밭에서 꿩들이 ‘꿔억’ ‘꿔억’ 요란한 소리를 내며 푸드덕 달아난다. 고개를 들어 보면 눈 덮인 한라산이 구름에 반쯤 가렸다. 한번 상상해보시라. 나는 이렇게 제주도에 산다.

박두호 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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