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기독인 16명 중 14명은 독립의지 지켰다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오해와 진실 <1> 민족대표 기독인 변절 논란

민족대표 기독인 16명 중 14명은 독립의지 지켰다 기사의 사진
대한민국 정부가 1962년 3월 1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개최한 ‘민족대표 33인 중 고인(故人) 합동 추념식’ 모습. 정부는 공적조사를 거쳐 민족대표들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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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 대부분은 1920년대 친일로 돌아섰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은 탑골공원으로 가지도 못하고 태화관에 있다가 조선총독부에 자수했다.”

역사 강사 설민석씨가 자신의 책과 특강을 통해 밝혔던 내용이다. 국민일보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인 16명을 상대로 진위를 확인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독인의 경우 ‘2명만 변절’이 정답이다(표 참조).

3·1운동 기독인 민족대표 16인의 삶을 추적한 이덕주 전 감리교신학대 교수는 3일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된 박희도와 정춘수만 변절했고, 김창준은 월북해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역임했다”며 “3인을 제외하고 13명은 모두 건국훈장을 받았다”고 밝혔다.

민족대표들은 왜 자수했을까. 이 교수는 “종교인으로서 폭력시위로 인한 희생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의 비폭력 평화운동 원칙을 고수하려는 의도가 강했다”면서 “무장투쟁 등은 또 다른 운동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했을 뿐, 기독인들의 독립 의지가 훼손된 것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실제 기독인 대표들은 일제의 재판 과정에서 흔들림 없이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혔다. 기독신보의 주필이었던 서울 정동교회 박동완 전도사는 법정에서 “조선 민족은 자존 자립정신이 있고 독립할 기회만 기다리고 있던 터요. 절대로 합병을 반대하고 절대로 독립을 희망하오”라고 진술했다. 천도교와 기독교의 회합을 주도한 이승훈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이갑성 김창준 오화영은 징역 2년 6개월, 신홍식 양백전 이명룡 박희도 최성모 이필주 박동완 신석구 유여대는 징역 2년, 정춘수는 징역 1년 6개월을 각각 선고받았다. 대표 격인 길선주 목사만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11년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아들을 잃고 치도곤을 당한 길 목사는 “독립청원을 위해 이승훈에게 도장을 맡겼다”는 소극적 진술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역시 1년 7개월가량 옥살이를 한 뒤 풀려났다. 감옥에서 길 목사는 요한계시록을 800번 읽고 이후 부흥 운동의 주제가 되는 말세론의 기틀을 잡았다.

수감생활 뒤 목회자들은 본인 교회로 돌아가 사역을 계속하며 신간회 활동이나 물산장려 및 농촌계몽 운동 등에 참여했다. 유일하게 일제의 체포를 피한 김병조 목사는 중국 상하이로 넘어가 임시정부의 밀알이 된다. 1962~63년 정부는 공적 조사를 거쳐 이들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북한에서 수난당한 인사들은 이후 포상자로 추가됐다. 길 목사도 2009년 독립훈장을 받았다.

민족대표의 노력을 비하하는 쪽은 조선총독부였다. 일제는 3·1운동을 망동(妄動)으로 왜곡하고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 독립을 결정한 것으로 오해한 조선인들이 일으킨 소요사태라고 주장했다. 민족대표들에 대한 공판에서도 이들에게 내란 혐의를 씌워 고등법원으로 이송했다가 철회한 뒤 재개하는 등 우왕좌왕했다. 결국, 보안법 출판법 위반만 적용했다.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은 “사형이 가능한 내란죄를 적용한다면 민족대표들이 진짜 순교자가 되니까, 이를 두려워한 일제가 망동으로 프레임을 바꾸고 해프닝으로 몰아갔다”고 말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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