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용만 (11) 재무부 과장 부임, 하나님 섭리이자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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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덕우 당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오른쪽 세 번째)과 함께 1978년 산업시찰을 위해 율산그룹을 방문한 이용만 장로(오른쪽 두 번째).
1967년 7월 나는 재무부 이재2과장으로 부임했다. 상사로 모시던 서봉균 청와대 정무비서관이 재무부 장관으로 영전하며 같이 가자고 강권했다. 재무부에 들어간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섭리이고 은혜였다.

이재2과는 저축을 독려하는 부서였다. 저축과 또는 은행과로 불렸다. 경제개발을 제대로 추진하려면 재원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극심한 재원 부족에 시달렸다. 내자(內資)를 동원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하라는 게 지상명령이었다. 저축기관다운 저축기관도 부족했다. 먼저 지방은행 설립을 도왔다. 대구은행 부산은행 충청은행 광주은행 제주은행 등 10개 지방은행이 이 시절 집중 설립됐다.




나는 오늘날 대기업의 성장 이면에 저금리를 통한 정부 혹은 납세자의 지원과 은행의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지도층은 “기업에 좋은 것이 나라에 좋은 것”이란 시각으로 기업 지원을 위해 기꺼이 은행권을 희생시키는 쪽을 택했다. 고금리로 예금을 받아 저금리로 기업을 지원하다 보면 은행이 부실해진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은행이 한국은행에 예치하는 지급준비금에 이자를 매겨주는 방식까지 동원해 지원책을 마련해 나갔다.

1969년엔 재무부 이재1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재1과는 우리나라 금융기관 전반을 다루며 부실기업 정리도 해야 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만났던 남덕우 교수가 재무부 장관으로 부임했다. 남 장관은 엄격한 계수 관리를 강조하면서 금융정책의 판을 처음부터 새로 짜기 시작했다.

이재1과장을 거쳐 1971년 곧바로 이재국장으로 승진했다. 재무부 핵심 요직인 이재국장을 3년 5개월 역임하며 최장수 재임 기록을 세웠다. 사심 없이 정책에 몰방하던 나날이였다. 나는 이때 사금융 양성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모든 자원이 대기업에 집중됐던 경제 개발기에 은행 문턱이 높았던 중소기업과 서민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먼저 은행권에서 흡수하지 못한 기업 자금이 고금리 사채로 운영되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단기금융업법’을 제정했다. 매일 ‘일수’를 찍는 서민 사채시장 자금을 양성화하기 위해 온갖 모함과 모략을 무릅쓰고 ‘상호신용금고법’으로 결실을 보았다. 상호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융통하면서 저축도 하고 필요한 곳에 쓰는 ‘신용협동조합법’도 만들었다. 비은행 금융기관의 기틀이 다져진 때였다.

중화학공업 개발을 위한 국민투자기금 제도도 마련했다. 이 역시 정부와 한국은행의 이자 보전으로 인한 재정과 통화 정책 지원으로 가능했다.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전환 역시 대규모 내자 조달이 관건이었다. 수출산업의 고도화를 위해 불가피했지만, 이 역시 은행과 국민의 희생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포항제철(현 포스코) 박태준 회장이 고생하고 기여해 영일만 신화를 이룩한 게 사실이지만, 포철 출범 당시 자본금 140억원은 정부와 은행의 출자금이었으며 다른 기업이 25%의 고금리에 시달릴 때 포철은 이자 없는 돈을 은행에서 가져다 썼다. 한국 대기업의 대주주 경영자가 2세나 3세로 넘어가더라도 다른 나라보다 사회에 더 큰 부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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