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용만 (12) 재무부 이재국장 맡아 최장수 재임 기록

고려대 자력 졸업 등은 北 고향 가면 조상께 자랑거리… 승진에 언론서도 호평

[역경의 열매] 이용만 (12) 재무부 이재국장 맡아 최장수 재임 기록 기사의 사진
신현확 국무총리(오른쪽)가 1977년 당시 재무부 기획관리실장이던 이용만 장로에게 홍조근정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통일이 돼서 내가 이북의 고향에 가면 조상님께 자랑할 일이 무얼까. 재무부 장관에 오르기 전까지는 3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고려대를 내 힘으로 졸업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5·16 이후 시험을 쳐서 당당히 중앙청에, 그것도 국무총리의 내각수반기획통제관실이라는 핵심부처에 다니게 된 것이다. 셋째는 재무부 이재국장을 맡아 최장수 국장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재무부에서 이재국장이란 일류대 학부를 나와서 행정고시에 합격한 사람도 앉기가 힘든 자리였다.



1975년 2월 나는 재무부 기획관리실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한 신문은 나의 승진을 이렇게 보도했다. “직업 관료가 승급하는 최고 직급인 1급 공무원직에 승진된 이용만 재무부 기획관리실장은 이번의 영전이 지난 3년 반 동안 난적된 재정·금융 업무를 무난히 수행해온 논공행상이라고 주위에서 평가한다.… 그는 대인관계가 폭넓고 시원시원하여 앞으로 부내 각국 간의 조정역을 잘 해낼 것이라는 평이다. 취미는 장기, 운동 등 다양하며 게임에 승부욕이 강하다.”

기획관리실장은 부서 내 업무조정이 중요하고, 그다음으로는 국회와 언론 관계를 능숙하게 처리해야 했다. 철두철미한 업무 처리로 유명한 당시 김용환 재무부 장관도 외부 활동에는 일부 어려움이 있었다. 이를 보완할 적임자로 나를 배치했고 나는 성심을 다해 일했다.

구원투수로 국회에 파견돼 의원들의 협조를 구하고 특히 야당을 설득하는 일을 도맡았다. 때로는 이른 아침에 의원 댁 방문을 감행했다. 엘리트 관료 중에는 조금이라도 굽히는 걸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나는 다른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국회의원의 입장이나 체면을 살려가며 설득하면 대부분 “그렇게 하지”라고 답해줬다. 1977년에는 재정차관보로 전보돼 재정·금융 업무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다.

돌이켜보면 한국 경제는 항상 위기였다. 늘 좋았다는 말로 과거를 치장하는데 쉽게 넘어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1970년부터 경제성장률이 한 자릿수로 뚝 떨어져 위기감이 커졌다. 1971년에는 베트남 휴전 협정 및 인근 국가 공산화로 인해 자주국방과 중화학공업 육성 필요성이 대두됐다. 재원 마련이 골머리였다. 1973년에는 1차 석유파동의 충격으로 세계 경제가 급락해 국내 경기도 냉각됐다.

1975년 하반기부터 세계 경제가 석유파동의 충격을 벗어나며 활기를 띠었고 막대한 오일머니를 벌어들인 중동 국가들이 의욕적 경제개발을 시도하며 중동 건설 붐이 나타났다.

연간 10억 달러의 외화가 국내로 쏟아져 들어와 구조적 흑자 경제를 꿈꿀 수 있었지만, 통화가 팽창돼 부동산 투기가 기승을 부렸다. 부동산 투기 억제책 시행으로 이번엔 시중 유동자금이 한꺼번에 증권시장으로 몰려 증시 안정화 대책을 내놓아야 했다. 1978년 8월 이후엔 타오르던 증시가 건설주 하락을 필두로 끝없이 하락했다. 많은 건설업체가 중동에서 받은 선수금을 공사하는 데 쓰지 않고 국내로 들여와 아파트 부지 매입에 사용하고, 재무부의 반대에도 이들 건설업체에 무차별 은행 지급보증을 해준 대가였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의 ‘역경의 열매’ 회고록은 공병호경영연구소 공병호 소장의 저작물(이용만 평전-모진 시련을 딛고 일어선 인생 이야기, 21세기북스, 2017)을 바탕으로 추가 취재를 통해 작성된 것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만 평전’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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