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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용만 (13) ‘전두환 처삼촌’ 면담 거절했다는 죄로 해직돼

“사표 내라” 통보, 이유를 묻자 “모르겠다”는 대답… 이규광 사장과 악연, 괘씸죄에 걸려 쫓겨나

[역경의 열매] 이용만 (13) ‘전두환 처삼촌’ 면담 거절했다는 죄로 해직돼 기사의 사진
이용만 장로가 모은 공무원증과 정부청사 출입증.
1980년 공직사회 분위기는 흉흉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터지고 12·12로 권력을 잡은 군인들은 80년 5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발족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이 상임위원장으로 전권을 장악해 각 부처의 공직자 숙청, 정치 활동 정화, 언론 통폐합, 삼청교육대 등 초헌법적 조치들을 기획했다. 당시 나는 재무부 재정차관보에서 경제과학심의회의 차관으로 자리를 옮긴 직후였다.

같은 해 7월 갑자기 “사표를 내라”는 통보를 받았다. 20년 이상 몸 바쳐 국가를 위해 일해 왔는데 이유라도 알고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이유가 뭐라고 합니까”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네. 다만 내일 자로 사표를 받으라는 지시뿐이네”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장관 1명, 차관 6명, 청장 5명, 지사 3명, 교육감 3명 등 총 232명이 옷을 벗었다. 나는 고위공무원 명단 맨 끝에 ‘추가’로 적혀 있었다.



재무부 엘리트들이 줄줄이 잘렸다. 금융정책과장이었던 김중웅(전 현대경제연구원장)은 김정렴(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사위라는 이유로, 이재2과장인 김인열은 김치열(전 법무부 장관)의 친동생이어서, 이재3과장이던 이한구(전 새누리당 대표)는 김용환(전 재무부 장관)의 동서란 죄목이었다.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내가 옷을 벗은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됐다. 80년 5월 18일로 추정된다. 그날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신현확 국무총리 주재로 긴급경제장관회의가 열렸고 이튿날엔 부총리 주재로 재무 농수산 상공 건설 등 경제장관회의가 예정돼 있었다. 급하게 재무부 안을 만들어 오후 2시까지 장관이 갖고 가야 한다는 지시가 떨어졌다.

눈코 뜰 새 없이 점심도 거른 채 자료를 작성하고 있는데 이규광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이 인사를 왔다고 했다. 재무부 유관 기관도 아닌 상공부 산하 기관장이었다. 당시 관행은 퇴임의 경우 노고와 위로의 말을 나누며 잠시 만났지만, 취임 인사 때는 명함만 놓고 갔다. 다음에도 만날 기회가 있기 때문이었다. 관례대로 이 사장에게 면담이 어렵다고 통보했는데 여직원에게 호통을 치고 나가버렸다고 한다. 이 사장은 전두환 당시 국보위 상임위원장의 처삼촌이었다.

난세엔 신중했어야 했다. 정권이 바뀔 때면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공직자들에 대한 쇄신 작업이 상시로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때 조그만 실수라도 하면 일이 크게 된다는 것을 체험했다. 훗날 이장규 경제전문기자는 나의 낙마에 대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책에서 이렇게 썼다.

“장인뿐 아니라 처삼촌인 이규광씨 또한 무시 못 할 영향력을 행사했다. 광업진흥공사 사장에 앉은 그의 면회 요청에 제때 만나주지 않은 이용만 재무부 재정차관보는 이른바 괘씸죄에 걸려 관에서 쫓겨나야 했을 정도였다.… 권토중래로 6공 들어 재무장관으로까지 명예를 회복한 이용만은 당시 자신의 죄목을 일컬어 ‘대통령처삼촌 면회요청 거절죄’라고 했다.”

해직은 엎질러진 물이었고 나는 다시 일어서야 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각오로 금융계에서 내 명예 회복의 발판을 마련하겠다고 작정했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의 ‘역경의 열매’ 회고록은 공병호경영연구소 공병호 소장의 저작물(이용만 평전-모진 시련을 딛고 일어선 인생 이야기, 21세기북스, 2017)을 바탕으로 추가 취재를 통해 작성된 것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만 평전’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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