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용만 (14) “은행장 이용만입니다, 저를 이용만 하세요”

중앙투자금융 거쳐 신한은행장으로…웃음 선사하며 고객에 가까이, 동화증권 인수 등 성장 초석 놓아

[역경의 열매] 이용만 (14) “은행장 이용만입니다, 저를 이용만 하세요” 기사의 사진
신한은행이 1986년 5월 경기도 용인 연수원에서 개최한 체육대회의 부장·지점장·임원 800m 달리기에서 1위로 들어오는 이용만 장로.
인생은 계획대로 척척 돌아가지 않는다. 역경이 있어야 열매가 있다. 공직에서 쫓겨난 뒤 금융계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결심했다. 어디든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다 보면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게 인생살이라고 생각했다.

1982년 2월 중앙투자금융 사장으로 가게 됐다. 주위에선 “차관까지 지낸 사람이 종업원 100명 남짓한 금융기관에 취직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중앙투자금융은 제1금융권도 아니고 제2금융권이었다. 당시 서울엔 7개 투자금융회사가 있는데 후발주자 1곳을 빼고 6등이었다.



나 스스로 영업맨이 돼야 했다. 매출을 올리려면 사장의 역할이 직원들을 독려하는 것에 그쳐선 안 됐다. 영업제일주의를 모토로 내걸고 창구 직원을 최소화한 뒤 모두 현장에 나가게 했다. 성과급도 도입했다. 상여금을 차등 지급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해 하반기부터 성과가 나타나 1983년 6월에는 업계 1위를 차지했다. 내가 회사를 떠난 뒤 7년이 지난 1992년에 발간된 ‘중앙투자금융 20년사’는 이렇게 평가했다.

“이용만 사장의 취임은 만년 중하위권에 위치하던 당사의 영업을 상위로 부상시키는 데 일대 전환점이 되어… 1984년 3월 업계 최초로 수신액 4000억원을 달성하여, 당사의 사세는 이때부터 도약의 길로 접어들었다.”

기회는 준비된 자의 몫이었다. 1985년 2월에는 2대 신한은행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신한은행은 지금처럼 규모 있는 종합금융그룹이 아니고 신생은행에 불과했다. 하지만 프런티어 정신으로 성장에 대한 열의가 가득한 기업이었다. 훗날 재무부 장관으로 복귀하기 전까지 신한은행에서 보낸 3년이 가장 보람 있었다. 은행장이 직원들과 함께 거리로 나가서 캠페인을 벌였다. 나는 새 지점이 문을 열기 전날이면 현장으로 달려가 주민들과 잠재 고객을 초청해 조촐한 리셉션을 가졌다. “저는 은행장 이용만입니다. 앞으로 저를 이용만 하십시오”라고 외쳤다. 참석자들의 웃음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서울 남대문 바로 옆에 있는 신한은행 본점 건물도 내가 행장 때 매입한 것이다. 남서울골프장 목욕탕에서 대왕흥산 김치곤 회장을 우연히 만나 벌거벗고 환담을 하다 그곳 건물과 땅이 시세보다 월등히 싸게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즉시 사무실로 돌아와 신한은행 재일동포 주주들에게 연락해 긴급이사회를 소집하고 차트를 준비했다. 당시 라응찬 전무와 함께 일본 오사카로 날아가 이사회에 안건을 보고하고 승인을 받았다. 남대문 1번지에 신한은행 본점이 들어서게 된 사연이다.

행장에 취임하자마자 동화증권을 인수해 신한증권으로 출범시킨 일도 기억에 남는다. 신한종합연구소 설립과 더불어 오늘날 종합금융그룹으로서 성장하는 데 초석을 놓았다. 신한은행 창립자 이희건 회장과의 신뢰도 차곡차곡 쌓여갔다.

신한은행 시절 체육대회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당시만 해도 규모가 크지 않아 부장 지점장 임원 전원이 참가하는 800m 달리기가 있었다. 공직에서 쫓겨난 뒤 남산체육관에서 절치부심하며 체력을 키웠던 노력이 빛을 발했다. 2년 연속 행장인 내가 1등을 했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의 ‘역경의 열매’ 회고록은 공병호경영연구소 공병호 소장의 저작물(이용만 평전-모진 시련을 딛고 일어선 인생 이야기, 21세기북스, 2017)을 바탕으로 추가 취재를 통해 작성된 것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만 평전’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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