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시사 > 전체기사

선교사들 해외에 3·1운동 상황 적극 알려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오해와 진실 <2> 선교사도 독립운동 도왔나

선교사들 해외에 3·1운동 상황 적극 알려 기사의 사진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의 한 민가가 불탄 모습. 일제는 3·1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제암리교회를 비롯한 일대 민가를 불태웠다. 프랭크 W 스코필드 선교사가 1919년 4월 17일 현장을 찾아 촬영했다. 국민일보DB
선교사들이 독립운동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지적은 사실일까.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엔 이미 수백 명의 선교사가 활동 중이었다. 감리교와 장로교 총회 임원 중에도 선교사들이 여럿 있었다. 그해 10월 평양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S A 모펫 선교사가 총회장이 됐을 정도로 선교사들은 활발하게 사역했다. 하지만 독립운동사에서 이들의 이름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선교사들은 조선의 독립을 방관하지 않았다. 조선헌병사령부가 3·1운동 직후 펴낸 ‘조선3·1독립소요사건 보고서’엔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대부분의 선교사가 (독립운동에 참여한) 조선인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 반면 우리 ‘관헌’에 대해선 반감이 있다. 또 소요를 진압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평을 한다.” 방관과는 거리가 먼 평가다. 많은 수의 선교사들이 독립운동을 지지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조선 독립을 사명으로 여겼던 선교사들도 있었다. 프랭크 W 스코필드 선교사는 제암리교회 학살을 전 세계에 알린 인물이었다. 세브란스 의전에서 세균학을 가르치던 그는 제암리에서 일제에 의해 학살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1919년 4월 17일 현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제암리교회와 주변의 민가들이 모두 잿더미가 된 광경을 목격한다. 눈 앞에 펼쳐진 참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경성으로 돌아온 스코필드는 외신기자들을 만나 사진을 넘겼다. 신문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접한 전 세계는 경악했다. 이듬해 일제에 의해 추방된 스코필드 선교사는 ‘끌 수 없는 불꽃’이란 제목의 책을 펴내 일제의 악행을 다시 고발한다.

스코필드의 분노는 호머 B 헐버트 선교사로 이어졌다. 헐버트는 서재필 선생과 함께 ‘한국통신부’를 만들어 일제의 민낯을 미국에 전하기 시작했다. 이를 기반으로 ‘한국친우회’를 조직했다. 미국의 정치인들과 유력 인사들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헐버트는 친우회를 ‘친한 여론’을 만들기 위한 통로로 활용했다.

이런 활동은 ‘미국기독교교회연합협의회’를 움직였다. 협의회는 1919년 여름 협회 산하에 있던 동양관계위원회 대표를 조선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일제가 3·1운동 직후 저지른 만행들과 인권 유린 상황들을 조사했고 이를 ‘한국 상황’이라는 보고서에 담았다.

헐버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친분이 있던 C S 토마스와 S P 스펜서 상원의원을 설득해 미국 의회에 ‘조선 독립 지지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표결에서 찬성 34표, 반대 46표로 부결되고 만다. 하지만 미국 조야에 조선이 독립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치만 장로회신학대 교수는 “당시 선교사들을 싸잡아 ‘독립운동을 방관했다’고 하는 건 바람직한 역사 해석이 아니다”면서 “헐버트와 스코필드 외에도 많은 선교사들의 선교보고를 통해 조선의 참상을 알리고 독립을 도왔다”고 말했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