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홍인혜] 마디가 필요하다 기사의 사진
어느 밤 친구와 카페에 앉아 있다고 상상해보자. 이미 긴긴 대화를 나눈지라 말할 거리도, 마실 거리도 잔 바닥에 말라붙어 가고 있다. 지금 시간은 오후 9시52분, 친구의 눈꺼풀에 졸음이 내려앉는 것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는 두 타입의 사람이 존재한다. 지금 시간이 몇 시든 ‘이만 일어날까’ 하는 사람과, ‘지금 9시52분이니까… 우리 10시에 일어날까’하고 말하는 사람.

나는 명명백백 후자의 사람이다. 그리고 사실 나와 같은 성미의 사람이 많음을 안다. 우리는 급박한 마감을 앞두고 쓸데없는 웹 서핑을 하다가도 문득 시계를 보고 ‘지금이 5시14분이니까… 5시 반부터 일하자’라고 다짐하곤 한다. 내일의 격무에 맞서기 위해 잠자리에 들어야 함에도 대화가 달콤해 끊을 수 없는 전화기를 붙들고 ‘지금이 11시45분이니까… 자정까지만 통화하자’라고 말하곤 한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왜 이렇게 특정한 시간을 변화의 포인트로 삼을까. 사실 숫자로 정의되는 시간이라는 개념은 나에게 절대적인 무언가로 여겨지지 않는다. 무한히 흐르는 강물 같은 것에 편의를 위해 설정해둔 몇 개의 마디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오나 자정, 정시 같은 개념은 일견 특별한 분절의 순간처럼 보여도 실상은 인간이 지구 자전 주기를 임의의 숫자로 쪼개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견지에서 보면 내가 5시52분보다 6시 정각에 의미를 두는 것이 다소 우습기도 하다.

시간만이 아니라 날짜도 마찬가지다. 나는 같은 헬스장에 수년째 다니고 있는데 근래 나를 담당하는 트레이너가 부쩍 피로해 보였다. 요즘 바쁘시냐고 물으니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연초잖아요.’ 아, 그렇구나! 모두가 운동을 다짐하는 연초, 헬스장이 가장 호황인 1월 초였던 것이다. 이처럼 신년을 맞아 새 삶을 다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날짜 또한 끝없이 이어지는 억겁의 세월에 인간이 꽂아놓은 미미한 깃발일 뿐이라 생각함에도, 나 역시 새해 첫날에 큰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1월 1일을 맞아 다이어리에 작성해둔 신년 계획이 이렇게 빼곡한 것을 보면.

시간이나 날짜 같은 개념이 절대값도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나는 왜 이토록 여기에 매달리는 것일까. 자신을 돌아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건 어쩌면 삶의 모든 동력을 스스로에게서 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 나는 그런 자신이 마땅찮았다. 삶을 꾸려나가는 데 있어 나 자신이 아닌, 외부적 무언가에 기대는 것은 무조건 본질에서 벗어난 거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모든 선택은 오롯이 나에게서 비롯되어야만 했고 ‘바깥’에서 의미를 찾는 건 다 부질없이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은 나의 부족함을 인정했다. 나는 연약하고 나의 심지는 그렇게 굳건하지 않다. 내 인생을 이끌어가는 모든 의지는 스스로에게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건강하게 살자고 다짐해 놓고도 동네 산책조차 하지 않는 나. 나는 그런 자신을 무작정 나무라기보다는 새 조깅화라도 사서 바깥으로 꼬드겨야 한다. 독서를 많이 하자고 다짐해 놓고도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는 나를 바꾸기 위해서는 친구들과 독서 모임을 만들어 벌금제도라도 시행해야 한다.

이런 식의 외부적 동력들은 때로는 허상으로 보이고, 본질이 아닌 듯 보인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넉넉한 마음으로 본다면, 외부적 동력이라도 제 역할을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시간적인 분절점들도 마찬가지다. 시간이란 끝없이 이어지는 세월 속에서 우리가 임의로 정해둔 마디일 뿐이지만 그것이 나를 움직인다면 이용하면 되는 것이다. 마냥 이어지는 시간 속에 연약한 인간으로 존재하며 모든 결심을 스스로만 해내기는 너무 버거우니까, 우리에게는 마디가 필요하다. 변화를 위한 분절점이 필요하다.

해가 바뀐 게 아직도 낯선데 시간은 벌써 1월 중순으로 흘러가고 있다. 금석 같은 나의 신년 계획은 벌써 삐거덕거리고 있다. 다이어리에 야심차게 적었던 다짐은 이미 몇 가지나 어겨졌다. 이럴 때 나는 한국인인 게 다행스럽다. 우리에겐 설날이 있기 때문이다. 한 해를 두 번 새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새해 소망이 금연이든, 감량이든, 하루 만보 걷기든 이미 흐지부지되고 있다면 우리 함께 설을 노려보자. 거대한 마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홍인혜 시인·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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