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임성수] 물을 가르는 대통령 기사의 사진
“세상을 바꿨다고 생각했는데 물을 가르고 온 것 같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다음 대통령 선거에 나가지 않겠다며 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은 인상적이다. 모든 정치인의 꿈은 대통령이라는데, 해보고 나니 흔적도 남지 않는 ‘물 가르기’처럼 허무하다는 말이다. 2009년 4월 20일, 노 전 대통령이 서거를 얼마 앞둔 시점에 한 말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무력감이 느껴진다. 정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아닐뿐더러, 어쩌면 유력한 수단도 아니다. “정치는 정치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 하면 되지.” 정치의 정점, 권력의 맨 꼭대기에 있었던 노 전 대통령의 말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예외 없이 ‘창대한 시작’과 ‘미약한 끝’을 되풀이했다. 국민 기대는 실망으로, 환호는 분노로 변했다. 그 분기점은 주로 집권 3년 차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바로 거기에 서 있다.

대통령 한 명이, 그것도 5년 단임제라는 시한 속에 해낼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대통령이 ‘백마 탄 초인’처럼 나타나 사회를 개조하는 마술은 가능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오히려 그 반대로 설계됐다. 성숙한 민주주의일수록 권력은 쪼개지고 분산된다. 대통령 혼자 모든 것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아무리 지지율이 높은 대통령이라도 독주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설득과 타협, 조정이 대통령의 최고 미덕이 돼야 한다. 국정은 대통령이 앞장서 내달리면 여당은 손뼉 치고, 야당은 야유하는 게임이 아니다. 대통령과 여야가 함께 가는 ‘2인 3각’이어야 한다. 이 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협치를 강조해 왔다. 여소야대, 다당제인 20대 국회에서 야당과의 협치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최근 여권에서는 야당과 국회 탓을 하는 말이 심심찮게 흘러나온다. “행정부와 여당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국민 여러분, 도와주십시오.”(조국 청와대 민정수석) “국회선진화법에 따른 의사결정 구조에 치명적 문제가 있다.”(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바로 이런 시각 탓에 무너졌다. “위기 상황의 돌파구를 찾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바로 국민 여러분이다. 이런 위기는 정부나 대통령의 힘만으로는 이겨낼 수 없다.” “우리 국회는 선진화법을 소화할 능력이 없다.”(2016년 신년 기자회견)

박 전 대통령은 야당을 비난하고 국회를 적대했다. 당시 야당 대표였던 문 대통령은 “정치는 사라지고 대통령의 고집과 독선만 남았다”고 비판했다. 박근혜정부를 청산하고 들어선 이 정부의 핵심 인사들에게서 ‘박근혜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위험 신호다.

문재인정부의 초심은 협치와 소통이었다. 문 대통령은 취임 첫날 직접 야당 당사를 차례대로 찾았다. 전 정부의 불통을 극복하겠다며 청와대 홍보수석 명칭을 ‘국민소통수석’으로 바꾸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10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경제와 외교·안보 현안에 대해 길게 설명했다. 대야 관계에 대해선 질문도, 답도 많지 않았다. 다만 문 대통령은 새 정무수석 임명에 대해 “야당과의 대화도 보다 더 활발하게 하고 싶단 뜻이 담겨 있다”고 했다. 야당에 더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어야 한다. 야당이 국민 눈에 예뻐서, 옳은 소리만 해서 협력하라는 것이 아니다. 야당은 원래 ‘반대하는 정당(opposition party)’이다. 야당을 설득하고 차선을 도출해내는 것이 대통령, 여당의 실력이다.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 차선의 예술”이라고 한 것은 정치가 타협이라는 뜻이었다. 발목만 잡는 것 같은 야당을 만나고 결과를 도출해야 한다. 지난해 말 국회를 통과한 ‘김용균법’도 청와대와 여야가 만들어낸 차선의 예술이었다.

문 대통령이 가장 신임한다는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은 취임 일성으로 ‘춘풍추상(春風秋霜·남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겐 엄격하다)’을 강조했다. 대통령이 반대하는 야당, 그중에서도 자유한국당부터 봄바람처럼 대한다면 정치가 ‘물 가르기’ 같지만은 않을 것이다.

임성수 정치부 차장 joylss@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