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주도홍] 눈사람이 된 현대인 기사의 사진
지난 연말 동네 서점에 들렀다. 서점에 가면 먼저 시집을 찾는다. 다음 내가 만나는 장르는 수필과 소설이다. 연말이면 등장하는 문학상 수상작이 눈에 들어왔다. 소문만 들었지, 아직 제대로 마주친 적 없는 세계적 명성을 얻은 소설가 한강의 작품이다. ‘작별’이 2018년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으로 베스트셀러 데스크에 올라와 있었다. 책을 펴자 앞부분에 실려 있는 심사평이 눈에 들어왔다. 두 쪽 분량의 심사평은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한 여인이 겨울 어느 날 벤치에 앉았다가 잠시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니 눈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어, 특이한데! 눈을 뗄 수 없었다. 얼마 전 카프카의 ‘변신’을 인용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그 변신을 닮은 소설이라니! 어떻게 사람이 눈사람이 된다는 말인지. 어떻게 추운 겨울 벤치에 앉아 잠이 들 수 있다는 말인지. 분명 그녀는 갈 곳을 잃은 게 맞다. 세상이 그녀를 차가운 겨울 바깥으로 내몬 것이 틀림없다. 권고사직을 당한 그녀가 사람에서 사물로 작별해야만 하는 현실을 그린 소설이라면, 그 세상은 분명 문제 많은 21세기 우리네 이야기일 것이다.

독일의 사상가 마틴 부버는 ‘나와 너’(Ich und Du, 1923년)라는 글에서 인간관계는 나와 너, 또는 너와 나의 관계여야 하는데, 부서진 관계는 나와 그것(Ich und es), 그것과 나의 관계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너와 인격적으로 만날 때 인간이 된다. 너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너의 자유를 존중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마음으로 하나 된다. 하나님은 진정한 너이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신 너이며, 인간이 추구해야 할 너와 나의 관계의 근원이다.

눈사람이 된 그녀는 따뜻한 사마리아인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눈사람으로 작별을 시작한 시점은 훨씬 이전이었을 게다. 겨울 야외 벤치에서가 아니라 이미 사무실에서 비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던 게 맞다. 그녀는 이미 소외된 직장에서 갈 곳을 잃은 것이다. 실적에 내몰리고 돈에 혈안이 된 한국 사회의 직장인들은 과연 다를까. 매일 아침 그들은 감당해야 할 무거운 짐을 지고 빽빽한 지하철 출근길로 들어선다. 이혼녀인 그녀에게도 예외 없이 책임져야 할 고등학생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눈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떻게 눈사람이 아들을 만날 수 있을까. 아들이 있는 따뜻한 실내로 들어가면 그녀는 녹아내린다. 그렇다면 아들마저 그녀가 있는 차가운 현장으로 불러내야 하는 비극에 직면한다. 방법은 사물화된 그녀가 다시 사람이 되는 것, 눈사람에서 사람으로 역작별을 해야 한다. 그렇지만 작가는 사물화된 사람을 고발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그 고발은 자체로 너무도 소중하다. 사람들은 굳어지는 답답함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모르고 있지 않은가. 문제가 너무나 은밀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들이 있는 집에 들어오지 못한 채 녹아내리는 눈사람으로 사라진다. “무엇을 보는지 알지 못한 채 사력을 다해, 그녀는 가까스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것은 우리가 기다리는 세상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녀가 사물을 떠나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복음은 어느 사이 사물로 변한 사람들에게 온기 어린 생명을 선물한다. 사물에서 사람으로 돌아서는 회개가 복음의 핵심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자신의 자랑은 날마다 죽는 것이라 했다. 왜 그가 날마다 죽어야 했을까? 그는 그리스도 안의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했다.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2019년 한국교회가 찾아 나서야 할 대상은 바로 이들이다. 눈사람이 되어버린 비인간들, 집 밖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이다. 가족마저도 만나지 못하는 바깥사람들이다. 마음이 식어버린 현대인들이다. 천사들이 가장 먼저 찾아가야 했던 바로 저 들 밖의 목동들이다.

주도홍 백석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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