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용만 (16) 11년간 현장 경험한 게 장관 수행 큰 도움

사람 많이 만나고 긍정적으로 생각 이상주의적 인사와는 갈등 빚기도… 증권시장 정상화 시킨 게 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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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0월 국제통화기금(IMF) 연차총회에서 재무부 장관 자격으로 연설하고 있는 이용만 장로.
공직 생활을 하면서 사무관 서기관 이재국장 기획관리실장 재정차관보 등을 역임했지만 재무부 장관(1991년 5월~93년 3월)은 특별한 지위였다. 재무 금융 행정과 관련해 내가 모든 최종 책임을 져야 했다. 책임을 질 만큼 실력이나 경험이 없으면 고전할 수밖에 없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야 하고, 그 가운데서 중요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해야 하고,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충분히 검토해 선택해야 했다. 더불어 관련 부처와 국회의 적극적 협조까지 끌어낼 수 있어야 비로소 정책으로 실행할 수 있었다.

다행히 인생에서 버릴 만한 경험은 하나도 없었다. 공직을 떠난 11년간 현장 경험을 한 게 장관직 수행에 큰 도움이 됐다. 중앙투자금융에서는 사채시장을 알게 됐다. 신한은행에선 시중은행의 영업 고민을, 외환은행에선 국책은행의 제반 문제를 파악했다. 은행감독원에선 감독업무 전반을 꿰뚫게 됐다. 1980년의 해직이 내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평전으로 옮긴 공병호 박사는 장관 시절 나의 업무 스타일을 네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 사람을 많이 만나고 많이 들었다는 점이다. 식사를 하루에 몇 끼씩 했는지 분간 안 될 정도로 인연을 가진 사람들을 자주 접촉했다. 둘째 온몸을 던져서 일했고 셋째 중요한 일은 치밀하게 준비했다. 넷째는 뭐든 되는 쪽으로 생각한 것이다. 안 되는 쪽으로 생각하면 자꾸 안 되니까 “그건 할 수 없습니다”가 아니고 “잘 해낼 수 있을 겁니다”라고 답하는 것이다.

장관 시절 정책의 우선순위는 첫째 물가 안정이었다. 부동산 투기 억제 등 경제 안정의 기조를 유지해야 했다. 둘째는 제조업 경쟁력 강화였다. 셋째는 대외 개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되 소탐대실을 피하고 국익에 우선을 두고 개방한다는 원칙이었다. 넷째는 우리 경제의 소화 능력을 고려해 금리 자유화를 단계적으로 추진한다는 점이었다. 금융시장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마지막은 공평 과세였다.

현실주의자였던 나는 이상주의 면모의 다른 인사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조순 한국은행 총재와 금리 인하 및 주식시장 안정화 대책에서 의견이 갈렸다. 평생 상아탑에 있던 인사들이 명분에 집착할 때 나는 당장 시장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되돌아보면 걱정거리였던 증권 시장을 정상화한 것이 가장 보람 있었다. 92년 전례 없던 3조원 규모의 한국은행 특별금융 지원과 일명 ‘빨리 사!(8·24)’ 정책으로 불린 ‘8·24 증권시장 부양 대책’을 발표해 환매 사태를 막고 증시를 정상 궤도로 끌어올렸다. 91년 연 19% 선이었던 시중금리를 93년 연 12%대로 떨어뜨리는 작업도 난제였지만 기업 투자 활성화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한국은 빈손으로 시작한 경제 성장이었기 때문에 서구 선진국과 확연히 달랐다. 금융이 재정을 보완한 덕에 오늘의 한국 경제가 가능했다. 관치에 대한 비판이 많지만 당시 우리 상황을 잘 이해해야 한다. 모든 은행의 대주주는 정부였다. 관 주도로 금융자금이 소비자금으로 쓰이는 걸 막고 산업자금으로 가도록 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적절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의 ‘역경의 열매’ 회고록은 공병호경영연구소 공병호 소장의 저작물(이용만 평전-모진 시련을 딛고 일어선 인생 이야기, 21세기북스, 2017)을 바탕으로 추가 취재를 통해 작성된 것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만 평전’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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