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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경성 연결한 장·감연합회, 전국적 만세운동의 기반 됐다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1부> 3·1운동과 기독교 (3) 에큐메니컬의 시초, 3·1운동

평양-경성 연결한 장·감연합회, 전국적 만세운동의 기반 됐다 기사의 사진
1921년 3월 1일 중국 상하이 올림픽극장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최로 열린 3·1 독립선언 2주년 기념식. 독립기념관 제공
3·1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의 합작품이었다. 장로교와 감리교의 협력은 각 교단이 부흥했던 평양과 경성을 연결한 가교가 됐다. 이 같은 연합은 당시 민중의 참여를 이끌어낸 원동력이었다. 일제강점기, 종교 지도자들이 나서지 않고는 전국적 만세운동은 불가능했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정병준 서울장신대 교수는 15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당시 인원을 모으고 자금을 동원할 곳은 전국 조직을 갖췄던 종교계뿐이었다”면서 “이들의 조건 없는 협력이 거사를 가능하게 한 힘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1차 세계대전 직후 ‘일원화’ ‘대중화’ ‘비폭력화’라는 3·1운동의 원칙을 정할 수 있었던 것도 종교 지도자들이 폭력 없는 세상을 강력하게 꿈꿨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덧붙였다.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 측 대표였던 이승훈 장로는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한 대표적인 장로교인이었다. 그는 1919년 2월 대규모 만세운동이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만세운동의 취지에 공감한 그는 곧바로 평안북도로 가서 감리교의 신홍식 목사와 장로교의 길선주 목사를 만나 협조를 구한다. 이들은 결국 민족대표에 이름을 올렸다. 이 장로가 교단의 벽을 넘어 감리교 지도자의 협력을 얻어낸 것이었다. 결국, 민족대표엔 장로교인 9명, 감리교인 7명이 참여한다. 청년단체인 YMCA까지 참여하면서 세대를 초월한 민족 대연합이 성사됐다.

앞서 감리교와 장로교는 교단 간 협력을 경험했다. 1918년 3월 조직된 ‘조선예수교 장·감연합협의회’를 통해 양 교단은 의료선교와 성서번역, 찬송가 발간, 교육 등을 공동으로 진행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록도 장·감연합협의회의 활동을 비중 있게 소개하고 있다. 그만큼 의미 있는 연합운동이었단 방증이다.

이들은 연합을 통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열망을 공유했다. 일제강점기 교파와 종교 간 연합이라는 도화지에 평화라는 그림을 그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세계는 평화를 갈망했다. 세계대전 직후인 1918년 말부터 스웨덴 교회의 나탄 죄더블롬 대주교는 ‘유럽 평화운동’을 제안했다. 이 시도는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창립할 때 WCC의 중요한 축인 ‘삶과 봉사’(Life and Work) 운동으로 귀결됐다. 이후 에큐메니컬 운동의 핵심인 교회 일치와 종교 간 평화 운동으로 확대됐다.

이런 면에서 3·1운동은 자생적 에큐메니컬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에큐메니컬 정신’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은 없지만 교회일치와 종교 간 평화운동을 지향하는 에큐메니컬 운동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교수는 “당시 지도자들이 에큐메니컬이란 개념을 몰랐겠지만 그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에큐메니컬적인 요소가 돋보인다”면서 “평화에 대한 인식이 유럽보다 빨랐다는 점, 폭력으로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각성이 100년 전 이 땅에 있었다는 점은 높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는 “100년 전 한국교회가 위대한 힘을 발휘했는데 지금의 교회는 그런 역할을 전혀 못 하고 있다는 게 오늘의 교훈”이라면서 “이제라도 분열을 멈추고 교회가 가진 잠재력을 키워내야만 시대적인 역할과 책임을 새롭게 감당할 수 있다”고 밝혔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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