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송길원 (2) 빠듯한 살림에 여섯 형제들 헤어져 ‘학업 난민’

초등교사 아버지의 적은 월급에 매 끼니 밥상에 죽 올라 와, 결국 외삼촌네로 보내져 생이별

[역경의 열매] 송길원 (2) 빠듯한 살림에 여섯 형제들 헤어져 ‘학업 난민’ 기사의 사진
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 목사(뒷줄 왼쪽)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찍은 가족 사진.
아버지는 성격이 괄괄했다. 분노를 못 참았다. 요즘 말로 하면 분노조절 장애였다. 버럭 성질이었다. 하루는 이모가 집에 찾아오셨다. 닭을 잡으려 하는데 잡히지 않자 아버지는 작대기로 쳐서 쓰러뜨렸다. 이모는 형부가 무섭다며 얼른 숨었다. 그렇게 해서 끓인 백숙의 목울대를 넘겨주며 어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이걸 먹어야 목소리가 좋아지는 거야! 너는 웅변을 하니까.”

어쩌다 친인척이 찾아올라치면 닭죽이었지만 팥죽 밀가루죽 감자죽 풀죽 등 수없이 죽을 먹었다. 죽은 이튿날 아침 밥상에도 어김없이 올라왔다. 죽을 지경이었다. 학교에선 급식으로 강냉이죽을 퍼줬다. 나는 소원했다. ‘어머니가 죽만 쑤지 않게 해 달라고.’



어머니의 자애로움과 달리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참 엄했다. 우리 집 두 녀석이 다 클 때까지도 아버지를 찾아뵈면 큰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 했다. 아버지가 ‘편히 앉아라’고 말씀하시면 그제야 다리를 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궂은일들을 도맡아 처리하는 ‘소사’라 불리는 관리인이 있었다. 측백나무 아래서 그네를 타고 있는데 그가 다가와 말했다.

“초등학교 선생님 월급이 얼마인지 아나?” 답을 알 리 없었다. 친절하게 2만원이라고 가르쳐 줬다.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그러면 “중학교 선생님은요?” 그러자 “4만원”이라 말하는 게 아닌가. 다시 물었다. “고등학교 선생님은 더 받겠네요.” “그렇고말고. 6만원이야.” 그러면서 마치 자기 일처럼 뻐기는 게 아닌가. 기막혔다. 초등학교 선생님인 아버지가 이렇게 초라하게 느껴지다니…. 마지막 질문을 던지기도 전 소사가 말했다. “대학교수는 10만원을 받는다. 대단하지 않냐?” 나는 그 말이 내 아버지를 조롱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때 결심했다. “대학교수가 되어야 한다.” 꿈은 그렇게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잠이 든 시각 부모님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길원이도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놀랐다. 이미 누나는 집을 떠나 있었다. 논산 훈련소에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큰 외삼촌 댁에 맡겨졌다. ‘가난한 초등학교 선생질에 아이 여섯 명이 뭐냐’고 투덜거리던 외삼촌의 제안이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부산의 작은 외삼촌 댁으로 보내졌다. 하나둘 우리 형제들은 뿔뿔이 헤어졌다. 막내만 부모님과 함께했다. 일종의 ‘학업 난민’이었다. 외할머니는 누나와 막내를 빼고 우리 넷을 키웠다. 어머니는 그때 수도 없이 편지를 썼다.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의 편지다.

“밤낮 파도 소리만 요란한 섬, 생각만 해도 아득한 섬 생활을 또 시작해서 두 달을 보내고 있다. 하루도 너희들이 잊히지 않는다. 날이 갈수록 보고 싶구나. 그러나 육 남매 앞날을 기다리고 바라보면서 거기다 희망을 건단다. 파도만 넘실거리는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마음을 달래가며 지낸다. 펜을 들고 보니 무슨 말을 쓸 수가 없도록 눈앞이 캄캄하기만 하다.”

유년의 궁핍과 생이별이 가져다준 것은 오로지 ‘가족’이었다. 역설이었다. 가정사역의 겨자씨는 그렇게 뿌려졌다. 나는 틈만 나면 우리 동네 죽집을 찾는다. 거기에 내 엄마가 있어서다. 나는 안다. ‘죽(粥)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 것을.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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