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티 테이블] ‘그레이 헤어’라는 선택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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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의 중년 여성들 사이에선 ‘그레이 헤어’가 인기다. 영어로 흰머리를 뜻하는 그레이 헤어가 유행한 데는 아사쿠라 마유미가 출간한 ‘그레이 헤어라는 선택’의 영향이 컸다. 염색을 중단하고 그레이 헤어를 선택한 배우와 디자이너, 주부 등 다양한 여성의 사진과 사연을 실은 책은 지난해 5월 초판이 나온 후 5만5000부가량 팔렸다.

아사쿠라 마유미는 최근 허프포스트 일본판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레이 헤어를 선택한 그녀들은 늙어 보인다고 두려워하기보다는 자신답게 살고 싶다는 가치관으로 그레이 헤어를 선택했다. 그녀들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고 머리 색깔을 패션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염색을 하는 것도 좋지만, 싫은데 계속 참고 계속 염색을 하고 있다면 그만둬도 좋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변해야 하는 것은 염색하지 않는다고 해서 ‘늙어 보인다’라든지 ‘칠칠치 못하다’라든지 ‘꼴사납다’는 말을 하는 풍토라고 생각한다.”

사회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노화의 흔적은 되도록 지우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유난히 젊은 몸, 어려 보이는 얼굴에 가치를 두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흰머리는 공적인 영역에서, 심지어 사적인 영역에서도 터부시돼 왔다. 그동안 노화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은발을 가리지 않고 당당히 드러내는 여성은 드물었다. 흰머리는 늙음을 그대로 방치하는 게으름, 자기 관리에 소홀함을 드러내는 약점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고위직 여성 리더의 백발은 외국에서 흔한 일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 재닛 옐런 미국 연방준비제도 전 의장 등은 은발로 국제 무대를 누빈다. 강경화 외무부장관도 누리꾼들 사이에서 IMF 첫 여성총재인 라가르드 총재와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와 관련해 강 장관은 과거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본래의 모습을 뭔가로 가리고 싶지 않다. 내가 일하는 곳(유엔)에선 머리 색깔에 대해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고 말하며 당당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나이 듦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죽음이 두려워서일 것이다. 여기에 논리의 순환과 모순이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들어서 죽는다. 그래서 죽을 것이기 때문에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한다. 모든 사람은 더 오래 살기를 바라면서도 아무도 늙는 것은 원치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심리적 신체적 변화를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싶으나 쉽지 않다. 나이 듦에 대해 편히 이야기하고, 불안과 불편을 터놓고, 더 나은 노년에 대한 지혜를 구해야 한다. 성경은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잠언 20:29)고 말한다. 노년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을 지킨 데 대한 은총이란 뜻으로 이해된다.

노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과 복을 증언하며 살아야 할 사명이 있는 시기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찾길 바라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영적 여정이라고 인식한다면 먼저 영적으로 성장하고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불필요한 소유와 인간관계를 덜어내고 참다운 나를 찾는 것이 단순한 삶의 핵심이다. 그래야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야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고대 영성가들은 나이 들면서 주의해야 할 것으로 교만과 시기, 분노와 태만을 꼽는다. 특히 시기를 치명적인 죄라고 말한다. 시기는 질투와 이기적인 야망과 결합하기 때문이다. 시기는 다른 악덕을 끌어들여 죄악을 더욱 악하게 만든다. 이웃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고, 누군가의 성공을 보고 불쾌감을 느낀다. 영국의 신학자 윌리엄 퍼킨스는 이를 ‘영혼의 욕망’이라고 말한다. 즉 자신의 소명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이의 소명을 탐하는 것이다.

욕망은 처음엔 문을 열어 달라고 간청하다가 어느덧 손님이 되고 마음의 주인이 된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자족하는 비결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제안했다. 노년은 인생의 결론이 아니고 불가피한 과정이다. 나이 듦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긴 세월 동안 쌓인 연륜을 내포하는 그레이 헤어도 패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지현 종교2부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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