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실에서] 딜쿠샤의 옛 주인 기사의 사진
서울 종로구 사직터널 위로 올라가 인왕산 쪽으로 발걸음을 잠시 옮기면 수령 500년은 돼 보임직한 커다란 은행나무를 만난다. 그 아래에는 ‘권율 도원수 집터’란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을 이끈 바로 그 권율(1537~1599) 장군의 집터다. 권율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 바로 옆에는 특이한 형태의 고택(古宅)이 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아치형 창문을 사방으로 낸 지하 1층·지상 2층짜리 서양식 근대가옥이다. 1923년 건축된 이 집의 이름은 딜쿠샤(Dilkusha). 인도의 고전어인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란 뜻이다. 누가 이런 이국적인 이름을 붙였을까.

딜쿠샤의 옛 주인은 일제 강점기 AP와 UP(현 UPI) 통신사 한국통신원으로 활동했던 미국인 사업가 앨버트 와일드 테일러(1875~1948)였다. 앨버트 테일러는 3·1운동과 제암리 학살 사건을 최초로 세계에 알린 인물이다. 그는 3·1운동 하루 전날, 출산한 아내(메리)와 아들(브루스)을 보러 세브란스병원에 들렀다가 우연히 독립선언서를 손에 넣는다. 병원 지하에서 독립선언문을 인쇄했는데 일본 순사들이 들이닥치자 서양인 병실은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간호사가 메리의 병실 침대 속에 숨겨둔 것이었다. 앨버트는 독립선언서 1부를 몰래 가지고 나와 동생 윌리엄을 시켜 관련 기사와 함께 도쿄의 통신사로 전달했고 3·1만세운동 소식은 그렇게 세계 각지로 타전됐다. 앨버트는 그해 4월 15일 일본 군경이 만세운동을 벌인 수원(지금의 화성시) 제암리에 들이닥쳐 주민 수십명을 무차별 학살한 소식이 들려오자 현장으로 달려가 취재했다.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렸고 더 나아가 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일본인 총독을 찾아가 양민 학살에 대해 항의했다.

일제가 1941년 말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 앨버트와 아내는 적대국가 국민이라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구금되거나 가택 연금됐고, 이듬해 강제 추방됐다. 미국으로 돌아간 앨버트는 광복 후 한국으로 돌아오려 했지만 48년 심장마비로 숨을 거둬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유언에 따라 유해는 그해 10월 서울외국인공원묘지(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딜쿠샤는 주인이 누구였는지도 모른 채 오랫동안 까마득하게 잊힌 존재였다. 딜쿠샤에 얽힌 사연은 앨버트의 아들 브루스가 수소문한 끝에 2006년 고향집 딜쿠샤를 찾아오면서 국내에 알려졌다. 금이 가고 비가 샐 정도로 낡았고 원형도 일부 훼손됐지만 용케도 살아남은 딜쿠샤가 구순을 앞두고 찾아온 백발의 옛 주인을 다시 만난 것이다. 딜쿠샤는 63년 국가 소유가 됐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 틈을 노려 집 없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둥지를 틀었다. 브루스가 방문했을 당시 무단 점유한 입주자들은 10가구가 넘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딜쿠샤와 호박목걸이’란 기증유물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브루스가 2015년 사망하자 딸 제니퍼가 서울시에 기증한 딜쿠샤와 테일러 가문 자료(1026건)들이 전시돼 있다. 앨버트가 촬영한 고종 국장(國葬) 사진, 아내 메리가 그린 조선 사람들의 초상화, 앨버트가 결혼 기념으로 메리에게 선물한 호박목걸이, 메리가 20여년 서울살이를 회고하며 남긴 책 ‘호박목걸이’ 관련 자료 등이다. 딜쿠샤는 지난해 8월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불법 점유하고 있던 마지막 가구가 지난해 7월 떠난 뒤 원형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올해는 일제의 식민 지배에 저항해 독립만세를 외쳤던 3·1운동 100주년이다. 엄혹한 그 시절 그 현장에는 우리의 고난을 증언하고 함께 아파한 외국인들이 있었다. 딜쿠샤는 세월이 가도 결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그들의 사랑을 보여주는 증표다.

라동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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