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송길원 (4) 대학 시절 부마항쟁 시위나섰다 유치장 구금

격변기에 겪었던 수감생활 통해 가족문제도 거시적으로 보게 돼, 당시 면회 온 교수가 훗날 장인

[역경의 열매] 송길원 (4) 대학 시절 부마항쟁 시위나섰다 유치장 구금 기사의 사진
송길원 목사(왼쪽 첫 번째)가 1979년 부산 중부경찰서에서 석방된 후 교정에서 친한 친구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 광복동과 남포동 일대는 아수라장이었다. 길거리는 온통 “유신철폐” “독재타도” 소리로 뒤덮였다. 최루탄이 난무했다. 동아대 등 대학생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식당 종업원에 재수생, 고등학생도 합세했다. 시민들이 나섰다.

부산 송도의 끝자락에 있던 고신대(당시 고려신학대)는 과(科)가 세 개 밖에 안 되는 단과대학에 불과했다. 거기다 세속과는 거리가 먼 신학교이지 않은가. 하지만 데모에 빠지지 않았다. 이른바 부마항쟁의 시작이었다. 초등학교 운동회 이후 이렇게 흥겹기는 처음이었다.





영화 ‘국제시장’의 무대가 된 부산미문화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때였다. 내 옆에서 팔짱을 끼고 함께 구호를 외치던 사람들이 경찰관일 줄이야. 그들의 호루라기 신호와 함께 전열은 쑥대밭이 되어 흩어졌다. 그들은 사람들을 사정없이 발로 차고 곤봉으로 내리쳤다. 나는 중부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됐다.

그때 나는 전국학생신앙운동 위원장이었다. 결국 데모 주동자로 찍혔다. 경찰관들은 날밤을 새우며 나를 조사했다. 고문으로 겁박했다가 짜장면으로 회유하기도 했다. 신학생들까지 데모에 참여했다는 게 상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여 졌다. 중부경찰서에 김성린 교학처장 등 학교 관계자가 찾아왔다. “다친 데 없느냐”는 질문도 없이 혀를 끌끌 찼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10월 27일. 이날따라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조사를 받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고 소식을 신문으로 접했다. 며칠 후 갇혔던 학생들이 풀려났다. 그렇게 해서 나는 출옥 성도가 됐다.

학교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사실 나의 대학 생활은 출발부터 꼬였다. 신학과였지만 철학 관련 과목을 계속 들어야 했다. 철학개론 시간이었다. 학생들의 사회 참여를 놓고 왈가왈부했다. 그때 내 이야기가 거칠게 들렸던지 신학과 교수는 버럭 화를 내며 물었다. “학생 이름이 뭐야?” 그날 이후 중세철학, 서양철학, 칸트 등 철학 수업에서 줄줄이 C만 받았다.

졸업을 앞두고 견딜 수 없었다. 교수 연구실을 찾아가 따졌다. “교수님, 어떻게 한결같이 C만 주십니까? 한 과목이라도 A를 받고 졸업하고 싶습니다.” 교수가 내 어깨를 치며 말했다. “자넨 용기도 대단해. 열심히 해 봐.”

시험 날 다른 두 과목은 아예 제치고 철학 과목만 열심히 준비했다. 다음 날이었다. 시험지를 받아들고 놀랐다. 내가 준비한 문제가 그대로 출제된 것이다. 두 장을 앞뒤로 빼곡하게 써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마지막 승자는 나야.” 그리고는 얼마 뒤 절망했다. 여전히 C였다.

“약속을 하지 말든지. 다신 당신 같은 교수는 안 만난다고. 대학원 진학하면 끝이야!” 그런데 그 교수를 자주 보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훗날 장인어른이 된 것이다. 중부경찰서에 찾아와 혀를 끌끌 찼던 그 교수였다.

수감생활이 내 인생을 또 한 번 뒤집어 놓았다. “나라에 대해 슬픔과 노여움 없이 살아간다면 나라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러시아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의 시구 중 일부) 가족 문제는 개인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는 미시적 안목이 아니라 사회환경을 보다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시적 안목을 갖게 된 것이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