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정신이 숨쉬던 교회, 물산장려·사회정화운동 펼쳐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1부> 3·1운동과 기독교 (4) 사회계몽운동의 구심점 역할

민족정신이 숨쉬던 교회, 물산장려·사회정화운동 펼쳐 기사의 사진
1933년 10월 대구에서 열린 제4회 조선주일학교대회의 금주운동 결의 모습. 사진 아래 술을 마귀에 빗댄 구호 ‘주마정벌군식장광경(酒魔征伐軍式場光景)’이 적혀 있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제공
한국교회는 1919년 3·1운동뿐 아니라 이후 활발히 펼쳐진 민족운동에서도 구심점 역할을 감당했다. 물산장려운동과 금주·금연 운동, 여성·청소년·농촌 운동 등 다방면에서 민족의식을 기르고 사회계몽을 하고자 노력했다.

일제의 기독교 탄압 본격화

1910년 경술국치 때부터 한국교회와 재한 외국인 선교사의 영향력을 견제해온 일제는 3·1운동 이후 기독교 탄압을 본격화한다. 일본조합교회를 한국에 침투시키는 이른바 ‘신종교 정책’도 이 중 하나다.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어용 교회인 일본조합교회를 세워 조선 땅에서 한국교회와 선교사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일본조합교회는 서울과 평양에 설립됐는데 이곳에 파견된 일본인 목사들은 기독교 교리를 왜곡해 조선의 식민지화를 합리화하는 ‘조선전도론’을 공공연히 퍼트렸다. 두 지역에 조합교회가 세워진 건 기독교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은 위축되지 않고 항일독립을 위한 사회계몽운동에 적극 나선다. 이치만 장로회신학대 교수는 “일제가 한국교회와 선교사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데 실패한 원인은 교회가 조선말로 대화하고 찬양할 수 있는, 민족의 얼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라며 “이는 한국교회를 중심으로 물산장려운동, 농촌운동 등 조선의 경제와 사회·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민족운동이 펼쳐질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교회, 민족운동으로 민족을 선도하다

한국교회가 주도한 민족운동 중 대표적 사례는 평양을 중심으로 일어난 물산장려운동이다. 평안남도에서 3·1운동을 주도한 조만식 선생과 평양 산정현교회 성도 등이 주축이 돼 1920년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면서 이 운동이 출범했다. 토산품 애용과 민족자본 육성운동뿐 아니라 술·담배·아편·매음을 지양하는 사회정화운동도 펼쳤는데 이는 아편 재배를 주도하고 홍등가를 도입했으며 술·담배에 세금을 부과한 총독부를 겨냥한 것이었다. 박용규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는 “조선총독부 예산의 3분의 1이 징수될 정도로 주초(술·담배) 문제가 심각해 교회를 중심으로 물산장려 및 절제 운동을 펼쳤다”며 “3·1운동 이후 일제가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며 우리 사회를 존중한 것처럼 행세했지만 실제적으로는 홍등가 도입과 아편 재배를 통해 조선 젊은이의 영적 건강을 저해하는 정책을 실시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한국교회는 1920년대 중반부터 농촌운동 등 사회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다. 농촌계몽운동은 YMCA와 YWCA 및 각 교단을 중심으로 확산됐다. 기독교계 농촌계몽운동은 과도한 관혼상제 등 악습을 타파하고 환금작물 재배를 권장해 농촌 지역의 경제와 문화를 개혁하는 데 공헌했다.

이 무렵 이뤄진 민족의 실력 배양을 위한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도 기독교계가 적극 동참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인인 이승훈과 이갑성은 각각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이사를 맡아 교육으로 독립을 도모하는 일에 앞장섰다.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교수는 “한국교회가 당시 전국 각지에서 민족운동을 벌이면서 나라 잃은 민족과 사회를 선도한 건 분명한 사실”이라며 “3·1운동 이후 경제·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사회개선운동을 펼치며 독립을 모색한 믿음의 선조를 한국교회가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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