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시사 > 전체기사

만세운동 주동자로 몰려 구타 당한 영국 선교사의 배상금, 첫 신사참배 반대의 밀알 되다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배상금 일부 건축 헌금…후일 첫 신사참배 거부한 교인 배출

만세운동 주동자로 몰려 구타 당한 영국 선교사의 배상금, 첫 신사참배 반대의 밀알 되다 기사의 사진
존 토머스 선교사가 일제에 받은 배상금으로 1924년 설립된 동양선교회 강경예배당 전경. 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제공

이전이미지다음이미지

1919년 3·1운동 직후 일경에 무차별 폭행을 당한 영국인 선교사의 ‘맷값’으로 지어진 교회가 있다. 동양선교회(현 오엠에스선교회) 조선감독 존 토머스 선교사는 1919년 3월 20일 충남 강경에서 만세운동 주동자로 몰려 일경에 폭행을 당한다. 이 사건은 동맹국이지만 중국에서의 이권을 놓고 경합하던 영국과 일본 간 외교적 공방으로 비화됐고 일제가 피해자 출국을 전제로 배상금 5000엔을 내놓으면서 일단락된다. 토머스 선교사는 배상금 일부를 강경성결교회 건축헌금으로 전달했는데 훗날 이 교회는 국내 최초의 신사참배 거부자를 배출했다.

박명수 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다음 달 26일 열리는 ‘한국성결교회 3·1운동 100주년 심포지엄’에서 이 같은 내용의 논문 ‘1919년 3월 존 토머스 구타사건과 국제정치’를 발표한다. 박 소장은 교계 자료로만 전해지던 이 사건의 전말을 영국 외무성의 공식 외교문서에서 처음으로 확인했다.

영국 웨일스 출신인 토머스 선교사는 경술국치가 일어났던 1910년 처음 조선 땅을 밟았다. 당시 그는 동양선교회의 예배당 격인 복음전도관을 전국에 세우고 목회자 양성기관인 경성성서학원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강경을 찾은 것도 강경복음전도관 예배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토머스 선교사는 강경으로 출발하기 직전 영국 총영사관을 찾아 여행신고를 마쳤다.

1919년 3월 20일 강경 일대에서는 3·1운동의 여파로 만세운동이 한창이었다. 토머스 선교사 일행이 강경복음전도관 부지를 조망하기 위해 언덕을 오르는데 마침 만세운동 참가자들이 이들 곁을 지났다. 만세운동을 단속하던 일경은 토머스 선교사를 주동자로 보고 확인 절차 없이 막대기로 구타했다. 일본 영자신문 ‘재팬 크로니클’의 그해 6월 보도에 따르면 당시 현장에서 토머스 선교사 일행을 포위한 이들은 30여명이었다.

이튿날 경성에 온 토머스 선교사는 영국 총영사관에 일경의 폭행 사실을 보고하고 진술서를 제출했다. 윌리엄 로이즈 대리 총영사는 즉시 조선총독부에 알리고 철저한 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동시에 주일 영국대사관에도 소식을 전해 일제가 즉각 사건 해결에 나서도록 요구했다. 이 같은 내용은 ‘로이즈가 그린에게(1919년 3월 24일)’란 제목의 영국 외무성 문서에 상세하게 드러나 있다.

조선총독부가 민간인이 폭행한 것처럼 왜곡하려 하자 주일 영국대사는 “문제가 조기에 수습되길 원하지만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영국 정부에 제기하겠다”며 일제를 압박했다. 일제는 배상금 5000엔을 제시했고 사건의 모든 책임을 인정하는 대신 토머스 선교사가 조선을 떠날 것을 요구했다.

토머스 선교사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양국의 합의에 따라 이듬해 조선을 떠났다. 배상금 일부를 동양선교회 강경예배당 건축헌금으로 남겼는데 이때 지어진 교회가 등록문화재 제42호 ‘구 강경성결교회 예배당’이다. 1924년 이 교회 성도와 주일학교 학생들은 국내 최초로 신사참배를 집단 거부했다.

박 소장은 23일 “일경은 외국인, 특히 서양 선교사가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부추겼다고 판단해 토머스 선교사를 무차별 구타했다”며 “일제가 당시 3·1운동과 국제사회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