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송길원 (5) 의대생들 돼지머리 놓고 고사 지내 학교 소용돌이

고신의대 교목 재직 중 터져, 학교 살리기 전념… 입시 부정 사건으로 해고 당해

[역경의 열매] 송길원 (5) 의대생들 돼지머리 놓고 고사 지내 학교 소용돌이 기사의 사진
송길원 목사(둘째줄 오른쪽 여섯번째)가 1989년 필리핀 세부에서 열린 ‘제2차 의료선교 세미나 및 선교훈련’을 마치고 대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고신대신학대학원 시절은 좀 달랐다. 내 인생에 더 공부할 기회는 없을 듯했다. 학부 때와 달리 열심히 도서관을 찾았다. 학교 수업에만 만족할 수 없었다. 목표는 한가지였다. ‘우물 안의 개구리로 살지 말자.’ 여러 세미나를 섭렵하면서 비로소 신학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조금 알 듯했다.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다. 졸업 후 농어촌 혹은 도시에서 개척하고 2년간 목회를 해야 목사 안수를 준다는 교단 방침이 생겼다. 동기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교단(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교육부 대표 간사로 발탁됐다. 교재 집필과 교회학교의 교사 훈련이 주 업무였다. 하지만 연구실은커녕 사무실 하나 없었다.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였던 김병원 박사님이 자신의 연구실 한 귀퉁이를 쓰도록 배려해 주셨다.




당시 복음간호전문대학(현 고신대 간호대학)의 교목을 겸임하고 계셨던 김 박사님은 급작스럽게 학장에 선임됐다. 나는 오갈 데 없이 방을 비워야 했다. 미안했던 박사님은 내게 복음간호전문대의 교목 자리를 제안했다. 나는 목사 안수도 받지 않은 강도사였다. 학교는 반대했다. 목사도 아닌 사람을 어떻게 교목으로 쓸 수 있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김 박사님은 학교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안수도 받기 전에 교목이 됐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고신의대의 교목 자리가 비었다. 학교에서는 의대 교목 자리까지 맡겼다.

캠퍼스 환경은 참으로 열악했다. 의대생들은 데모로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돼지머리를 갖다놓고 고사를 지냈다. 참담(慘憺)이 아니라 참람(僭濫)한 사건이었다. 학교는 소용돌이쳤다. 의과대학 폐지론이 비등했다. 신학교만 하자는 거였다. 내가 목사라는 게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다. 학생들을 붙잡고 울었다. 미안하다고. 몇몇 교수들과 접촉했다. 말없이 학교 살리기 운동이 일어났다. 무엇보다 기도로 학교의 정체성을 세워야 했다.

방학 때 학생들과 함께 필리핀으로 단기 의료선교 여행을 떠났다. 당시엔 획기적인 일이었다. 선교비를 마련하기 위해 건강키트를 만들어 팔았다. 제약회사를 섭외해 약을 지원받았다. 이랜드의 지원으로 병원 주차장에서 바자회를 열었다. 여전히 학교는 무관심이었다. 선교지에 다녀온 학생들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장학금을 휩쓸었다. 싸늘한 교단의 분위기도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학교에 있으면서도 학업에 대한 목마름이 컸다.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고려대 교육대학원에 입학해 상담심리를 공부했다. 더 공부하고 싶었다. 캐나다 밴쿠버의 리전트칼리지에 합격했다. 김영진장학재단에서 장학금을 준다고 했다. 캐나다 입국을 위해 준비할 무렵, 학교에서 또 다른 사고가 터졌다. 입시부정 사건이었다. 당시 의료원장과 의대학장(의학부장)이 수감됐고, 학교는 학생들의 수업 거부로 난장판이 됐다. 해직 교수들이 생겨났다. 나도 해고 통보를 받았다.

‘하나님은 부서진 것들을 사용하신다’는 말이 있다. 단단한 곡식도 부서져야 빵이 된다. 향기로운 포도주로 태어나기 위해 탐스러운 포도송이도 부서지고 묵혀져야 한다. 나는 2년 반 동안 헤매야 했다. 인생의 광야였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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