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대법원장 피의자 심문 ‘초유의 상황’ 사법부가 자초했다 기사의 사진
사법농단 의혹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이 23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은 뒤 법정을 빠져나오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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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어떤 정황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법원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이인복 전 대법관)는 2017년 4월 이 같은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위는 그해 3월 블랙리스트 의혹이 불거지자 이를 확인하겠다며 꾸려진 내부 조직이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기였다.

결과를 놓고 법원 안팎의 비판 여론이 거셌다.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그해 9월 취임 직후 다시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지난해 1월 추가조사위(위원장 민중기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법관 동향 파악 문건 다수가 발견됐으나 그것이 블랙리스트인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고 했다. 당시 판단을 회피했다는 지적과 함께 재조사 필요성이 거듭 제기됐다.

이후에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대법원 특별조사단(단장 안철상 전 법원행정처장)은 지난해 5월 “블랙리스트로 인정할 만한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고 그 밖의 사항은 뚜렷한 범죄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안 전 처장은 그로부터 두 달 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재판거래를 인정할 만한 자료나 사전정황은 발견하지 못했다”며 “형사 책임을 져야 할 사람도 없다고 파악했다”고 강조했다.

법조계에서는 전직 대법원장이 피의자 신분으로 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는 초유의 상황을 사법부가 자초했다는 시각이 많다. 대법원은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이 제기된 이후 세 차례의 자체 조사를 벌였다. 결과는 모두 ‘관련 의혹은 사실무근’ ‘죄가 되지 않는다’는 식이었다. 국민들은 대법원의 조사 결과를 신뢰하지 않았다. 여론조사 기관인 리얼미터는 지난해 1월 블랙리스트 의혹 관련 수사에 찬성한다는 여론이 69.7%라고 밝혔다. 이는 보다 철저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참여연대 등은 같은 달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 등을 직권남용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23일 “대법원 자체 조사단들은 ‘의혹은 사실무근’이라는 전제를 깔고 사안에 접근했다”며 “부실 조사 논란을 스스로 만들어 낸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김 대법원장이 수사 협조 의사를 밝혔던 점도 ‘악수’로 꼽힌다. 그는 지난해 6월 대국민 담화에서 “대한민국 법관 그 누구도 재판 거래가 (실제 이뤄졌다고) 상상할 수 없다는 저의 개인적 믿음과 무관하게 의혹 해소가 필요하다”며 “수사에 협조를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검찰에 사실상 수사 의뢰를 한 거라는 평가가 당시 지배적이었다. 법원 안팎에서는 김 대법원장의 발언을 두고 “대법원장이 검찰의 손에 ‘칼’을 쥐어줬다”는 얘기가 나왔다.

법원이 검찰 수사에 협조적이지 않았던 것은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법원은 검찰이 청구한 압수수색 영장의 대부분을 기각했으며 ‘사법농단 1호 구속영장’도 발부하지 않았다. 법원 내부 통신망에는 검찰의 압수수색 및 구속 수사 관행을 비판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제 식구 감싸기’라는 비판이 나오면서 검찰 수사는 오히려 명분을 얻었다. 검찰은 ‘강제징용 소송’ 등 재판거래 의혹, 헌법재판소 기밀 유출 의혹 등 새로운 ‘사법농단’ 정황을 밝혀냈고 지난해 11월 임 전 차장을 구속 기소했다.

문동성 구자창 기자 theM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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