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송길원 (6) 性 이야기를 예화로… 해프닝 거쳐 가정사역 꿈틀

그 당시엔 어색하고 용납 안돼… 2년 반 광야에서 보낸 후 호산나교회 협동목사로 생활 설교

[역경의 열매] 송길원 (6) 性 이야기를 예화로… 해프닝 거쳐 가정사역 꿈틀 기사의 사진
송길원 목사(앞줄 왼쪽 세 번째)가 1992년 기독교가정사역연구소 설립예배를 드린 후 최홍준 당시 부산 호산나교회 목사(앞줄 가운데) 등 연구소 이사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호산나교회는 가정사역의 못자리 역할을 했다.
크리스천 작가 캔 가이어는 이런 말을 했다. “글을 쓰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이 광야로의 부르심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작가로 준비시킨 곳은 신학교가 아니라 바로 그곳이었다. 광야는 고통과 굴욕과 불확실함과 고독과 절망의 장소였다. 마땅히 되어야 할 작가가 되려면 내가 되고 싶었던 작가가 되려면, 내가 기도했던 그런 작가가 되려면. 내가 절망해 보지 않고 어떻게 절망한 자들의 심정을 알 수 있겠는가.”

1991년 나는 알았다. 인생의 허들 경기에서 장애물은 넘어지라고 있는 게 아니라 넘어서라고 있다는 것을. 헤매었던 2년 반은 내게 ‘광야 신학’의 시간이었다. 절망과 흑암 속에서도 하나님은 작은 창문 하나를 열어놓고 계셨다. 최홍준 부산 호산나교회 목사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전에 내가 교목을 하면서 최 목사님을 협동 교목으로 위촉한 일이 있었다. 이번엔 목사님이 거꾸로 내게 제안했다. “내가 협동 교목으로 도왔으니 이젠 송 목사가 협동 목사로 품앗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나는 호산나교회의 협동 목사가 됐다. 목사님은 주로 복음적 설교를 했고, 나는 저녁 강단에서 상담 및 생활 설교를 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어떤 부부가 받침이 있는 날 관계를 갖기로 했다죠. 월요일 목요일 금요일 이런 식으로 말이에요. 월요일이 지나고 목요일이 됐는데 부인이 아무런 반응을 안 하는 거예요. 남편이 물어요. ‘여보 오늘 무슨 요일이지?’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지 부인이 ‘난 몰라요. 당신이 아직도 20대인 줄 알아?’라며 대답했답니다. 아내는 이렇게 말했대요. ‘여보 오늘은 모요일이에요. 모요일.’”

‘자기 몸을 자기가 주장치 못하고’(고전 7:4)에 대한 풀이로 설교한 예화였다. 이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앞에서 듣던 장로님은 민망해 고개를 푹 숙이셨다. 30여 년 전 만 해도 성(性) 이야기를 강단에서 꺼내는 게 어색하고 용납이 안 됐던 시절이다.

이튿날 일찍이 최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송 목사, 어젯밤 우리 집에 뭔 일이 일어났는지 아남?” “예? 무슨 일?” “어젯밤 우리 집은 ‘이요일’이었다. ‘이요일’” 그 한마디가 던진 위로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사모님이 내게 귀띔했다. 그날 저녁 설교가 최고였다고. 가정사역은 그런 해프닝을 거쳐 시작되고 있었다.

92년 최 목사님은 방학을 이용해 미국에 가시면서 나에게 동행을 제안했다. 미국교회는 우리 교회와 달랐다. 이혼자 클럽, 중독자 클럽 등이 있었다. 가정을 보는 관점이나 접근 방식이 달랐다. 30~40대를 위한 특별 예배가 진행되기도 했다. 신혼 가정 돌봄 프로그램을 보면서 가슴 뭉클함을 느꼈다.

미국교회를 보고 가정사역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해 9월 18일 ‘기독교가정사역연구소’를 열었다. 아무도 걸어보지 않은 길이였다. 어떤 보장도 없었다. 가정사역은 그렇게 첫 포문을 열었다. ‘가정을 교회처럼, 교회를 가정처럼’이라는 슬로건을 정했다. 한국교회의 심장에 박히는 화살촉과 같았다. 나는 안다. ‘하나님은 내가 있어서는 안 될 곳에서 나를 내어 쫓으심으로 나를 부르시기도 한다’는 사실을.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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