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송길원 (7) 부산서 병원 입원실 빌려 가정사역 시작

처음엔 ‘기독교가정사역硏’에 갸우뚱…결혼예비학교·부부세미나 시작하자 소문이 번져가며 폭발적 인기

[역경의 열매] 송길원 (7) 부산서 병원 입원실 빌려 가정사역 시작 기사의 사진
송길원 목사(왼쪽)가 1997년 기독교가정사역연구소(하이패밀리의 전신)에서 열린 ‘행복플러스 해피나’ 세미나에서 참석한 부부를 위해 기도해주고 있다.
“목사님 돈이 급하게 필요한데…. 좀 도와주세요.”

지금도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돈이 많은 줄 아나 보다. 심지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난 진골, 성골도 아닌 무골이었다. 그냥 배고픈 사람이었다. 역경의 열매를 통해 나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별거 아닌 것을 별것으로 만들어내는 것을 예술이라고 한다. 전위작가 백남준의 눈에는 버려진 TV가 예사롭지 않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작품의 소재였다. 정크 아트(Junk Art)는 그렇게 탄생한다.

사물이 아닌 ‘사람’을 정크 아트의 소재로 삼으신 분이 계셨다. 예수님이셨다. 당시 쓰레기 같은 인간 취급을 받은 세관장과 세리가 있었다. 레위는 세리의 대표 명사였다. 예수님을 만난 레위는 이름부터 바뀌었다. 선물이라는 뜻의 ‘마태’라는 이름으로 새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를 다듬고 다듬으셨다. 마태는 복음서의 첫 번째 저자로 등재된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예수님이야말로 첫 번째 정크예술가였던 셈이다.

부산 해운대구 재송동 104번지 박종권 신경 정신과 208호. 1992년 가정 사역의 첫 출발을 이곳에서 시작했다. 2.5평(8.3㎡)의 입원실이었다. 병원에서 입원 환자를 받지 않게 되면서 빈방을 쓰라고 한 것이다. 병원 전화도 빌려 썼다. ‘기독교가정사역연구소’를 접한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당시 교계 내 단체들은 대부분 선교회라는 이름을 붙일 때였으니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가정 세미나에 참석하라고 권면하면 첫 번째 나오는 반응이 이랬다. “저희 부부는 문제없는데요.” 지금도 그렇지만 문제없다는 사람들에게는 진짜 문제가 많다. 가정사역이라는 단어도 저항이 거셌다. 더구나 목사가 가정 NGO를 이끈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겨우 했던 일이 번역 작업과 자료 수집이었다. 사무실에 전화 한 통화도 없는 날이 허다했다. 수입이 있을 리 없었다. 선교회가 아닌데 누가 후원을 하겠는가. 부산 호산나교회가 기회를 줬다. 결혼예비학교를 시작했고 부부 세미나를 진행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소문이 말없이 번져나가는 것 아닌가.

94년은 유엔이 정한 ‘가정의 해’였다. 유엔은 매해 이슈가 되는 것을 의제로 던진다. KBS에서 전화 인터뷰 요청이 왔다. 국민일보에서는 ‘송길원의 가정칼럼’을 연재하게 됐다. 극동방송에서는 괌 세미나를 기획하자고 했다. 그 세미나는 당시 해외여행 대성황을 타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지금 라오스에서 야구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이만수 감독도 찾아왔다. 명사들이 줄을 이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나 같은 무지렁이도 쓰시는 주님이 못하실 리 없다는 것을.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 13:8) 다른 저자가 30배, 60배, 100배 순으로 이야기하는 것과 다른 마태의 고백이다. 계산이 빠른 마태의 의도는 이런 게 아니었을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뿌린 씨앗의 100배를 열매 맺을 수 있을까. 그래. 안 될 수 있다. 60배는 된다. 그것도 아니라고? 그럼 최소 30배는 보장받을 것이다.’ 주님의 손에 붙잡히기만 하면 주님은 몽당연필 같은 내 인생으로도 명화를 그려내시는 분이시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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