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의 선생님’ 앨리스 선교사를 아시나요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40년간 여성지도자 양성에 헌신

‘유관순의 선생님’ 앨리스 선교사를 아시나요 기사의 사진
유관순의 선생이자 공주 영명학교 설립자인 앨리스 샤프 선교사. 국민일보DB

이전이미지다음이미지

1910년대 당시 충남 목천군 이동면(현 천안시 병천면)은 서울과 공주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이 부근을 자주 왕래하며 교회를 세웠다. 같은 면 지령리(현 용두리)에도 교회가 세워졌고 선교사들이 방문했다. 이곳에서 자란 소녀가 푸른 눈의 여성 선교사를 만난 것은 이 무렵이다.

선교사는 소녀가 교회에 나오는 것을 기뻐했고 성경을 술술 암송하는 것을 기특하게 여겼다. 소녀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할아버지와 숙부가 일찍부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덕분이었다. 선교사는 그녀 가족을 만나 자신이 세운 학교에서 공부를 시키겠다고 제안했다. 가족들은 흔쾌히 허락했고 소녀는 1914년부터 2년간 중등과정을 다녔다. 선교사의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소녀를 자신의 양녀로 삼았고 1916년엔 서울 이화학당에 교비 장학생으로 전학시켰다.

미국 북감리회 소속으로 1900년 조선에 온 앨리스 J 해몬드 샤프(1871~1972) 선교사와 3·1만세운동의 아이콘, 유관순과의 인연이다. 앨리스 선교사의 한국 이름은 사애리시(史愛理施). 사람들은 그녀를 ‘사부인’으로 불렀다. 초기엔 메리 스크랜턴 부인과 함께 이화학당 교사이자 상동교회 주일학교 교사와 순회전도자로 활동했다. 1903년 한 살 연하인 로버트 샤프 선교사와 결혼, 1905년 충남 공주로 내려가 충청지역 최초 근대적 학교인 영명학교를 설립했다.

신혼의 꿈과 새로운 사역에 대한 희망도 잠시, 남편인 로버트 샤프 선교사는 노방전도 중에 장티푸스에 걸려 1906년 사망했다. 앨리스 선교사는 남편을 영명학교 인근 언덕(영명동산)에 묻고 미국으로 귀국했다가 1908년 돌아와 선교사역을 이어갔다. 1909년 충남 강경 만동여학교, 논산 영화여학교 등을 세우며 여성교육에 매진했다. 영명학교는 유관순을 비롯해 한국 최초 여성 경찰서장 노마리아, 감리교 최초 여성 목사 전밀라, 철도간호학교 설립자 박한나 권사 등 여성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앨리스 선교사는 1940년 일제에 의해 국외 추방 조치를 당할 때까지 40년을 교육 선교에 힘썼다. 1930년 당시 동아일보는 앨리스 선교사의 기사를 게재하며 “30년을 하루같이 교육과 선교에 헌신했다”고 기록했다. 앨리스 선교사의 유해는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의 납골원에 안장돼 있다.

샤프선교사기념사업추진위원회와 한국선교유적연구회(회장 서만철)은 오는 3월 1일 오후 2시 공주영명고와 중학동 선교사 가옥 인근에서 각각 공주기독교 3·1운동 100주년기념예배와 샤프 선교사 동상 제막식을 개최한다. 동상은 현 영명중고교 뒷산 선교관 인근에 세워진다. 서만철 회장은 “선교사기념관 건립과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등을 추진하고 있다”며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선교사들의 선한 영향력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신청하기

국내외 교계소식, 영성과 재미가 녹아 있는 영상에 칼럼까지 미션라이프에서 엄선한 콘텐츠를 전해드립니다.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