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송길원 (9) 옥한흠 목사 문하생으로 추천받아 목회 배워

‘성매매 거부 남성 서명운동’ 계기 ‘건강가정시민연대’ 공동대표 맡아 훈장까지 받고 서울에 연구소

[역경의 열매] 송길원 (9) 옥한흠 목사 문하생으로 추천받아 목회 배워 기사의 사진
송길원 목사(오른쪽)가 최일도 다일공동체 대표, 김덕룡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고 옥한흠 사랑의교회 목사(왼쪽부터) 등과 함께 2003년 ‘성매매 거부 남성 10만 서명운동’에 서명하고 있다.
나는 가정사역의 독학 세대였다. 온몸으로 싸우며 배워야 했다. 교과서로 배운 게 아니다. 한국교회의 가정사역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삶의 멘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시작됐지만 사역은 전국구였다. 가정사역을 한다면서 집을 떠나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최홍준 부산 호산나교회 목사님은 나를 자신이 부목사로 있었던 당시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님께 추천해주셨다. 나는 옥 목사님의 문하생으로 목회를 배우게 됐다.




2001년 5월이었다. 옥 목사님이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실 때였다. 목사님은 불면증에 건강까지 좋지 않으셨다. 안타까운 마음에 이렇게 말씀드렸다. “목사님, 이제 골프라도 해 보시지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알들 해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성도들 배신 안 할 거야!” 그때 목사님에게서 느낀 서늘함이란…. 언제나 다정다감하신 분에게서 느끼던 그 서늘함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한 번은 다음 주 설교 주제를 내게 말씀하셨다. “성매매 시장이 심각합니다”라고 하시며 통계까지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여성들이 아니라 성을 매수하는 남자들이 문제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성매매 거부 남성 10만 서명운동’이 시작됐다. 대학 총장들부터 시작해 각계 인사들이 참여했다. 명동 거리 한복판에서 캠페인이 시작됐다.

그날 옥 목사님은 KBS 뉴스에서 인터뷰하셨다. 결국 ‘성매매 방지법’(2004년)을 촉발하신 것이다. 시민운동으로 나아가는 첫 단추였다. 나는 여러 법안의 발의에 직·간접으로 관여하게 되고 결국 ‘건강가정시민연대’ 공동대표까지 맡았다. 전방위로 뛰었다. 정부는 훈장을 주며 그 공을 인정해줬다. 학교 다닐 때 겨우 개근상 정도를 받았던 내가 훈장을 받다니….

일산에 있던 작은 연구소를 서울 서초구 양재동으로 옮기게 된 것도 옥 목사님 덕분이었다. 어느 날 내게 봉투를 하나 내미셨다. “이거 보태라.” “아니 이미 교회서 하지 않았습니까?” “교회는 교회고 내가 개인으로 하는 거야.” 어딜 가나 옥 목사님이 계셨다. 그 후광 효과는 컸다.

2010년 9월 2일 내게 들려온 옥 목사님의 부음 소식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얼마나 황망했던지 강의 자료가 담긴 노트북 가방을 길거리에 놓고 차를 몰았다. 많이도 울었다.

장례식이 열리던 사랑의교회 안성수양관에서 뜬금없이 가족들이 영정사진 옆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일이 벌어졌다. 둘째 아들 승훈군이 조문객들에게 말했다. 바쁜 목회 일정에 변변한 사진 한 장이 없어 돌아가신 후에라도 가족사진을 찍는 것을 양해해 달라고.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덧붙였다.

“제가 목사님들께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신학 서적을 열 권 보시고 나서는 가정에 대한 책도 한 권씩 봐주셨으면 합니다. 사모님들은 산후우울증에 걸릴 수 있고, 자녀들이 사춘기에 어떤 갈등을 겪는지 좀 아시고 잘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모든 목사님의 가정이 행복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옥 목사님이 둘째 아들을 통해 한국교회에 남기고 싶었던 마지막 유훈이었다고 여긴다. 지금도 목사님이 그리울 때면 묘소를 찾는다. 따뜻한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 “자~알들 하고 있지?”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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