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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우리가 근대 민족으로 거듭난 역사적 사건”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1부> 3·1운동과 기독교 (5) 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 인터뷰

“3·1운동은 우리가 근대 민족으로 거듭난 역사적 사건” 기사의 사진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이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 연구소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송지수 인턴기자
국민일보는 지난 1일부터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연중기획을 보도하고 있다. 1부에선 3·1운동의 역사적·사상적·신학적 배경을 조명했고 오해가 많은 사실들에 대한 검증을 진행했다. 기독인 민족대표 16인 가운데 변절자는 2명뿐이란 점과 3·1운동은 주일을 피해 거사일이 결정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00년 전 교파의 벽을 넘어 하나로 뭉쳤듯이 3·1정신으로 분단을 극복하자는 메시지도 전달했다.

1부를 마무리하며 연중기획 총괄 자문에 응한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을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 연구소에서 만났다. 김 소장은 개별 독립운동가와 지역 교회를 세밀하게 조명할 2부 ‘독립운동과 한국교회’ 편에 대해서도 “역사가 오랜 교회들은 거의 모두 3·1운동에 참여한 신앙 선배를 갖고 있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평생 한국교회의 독립운동을 연구해 오셨다.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압축해 말해 달라.

“3·1운동은 우리가 근대적 민족으로 거듭난 ‘중생(重生)의 역사적 사건’이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독립국임과 우리 민족의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이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일제의 총칼 앞에서 평화적 만세 시위를 한 사건이다. 그해 5월말까지 50명 이상이 참여한 시위가 1500여회였다. 연인원 202만명이 참여했다. 당시 인구 1800만명 가운데 10% 이상이 동참했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결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워 국민이 주인 되는 나라를 꿈꾸게 된다.

3·1운동은 또 ‘미완의 혁명’이다. 독립선언서에 나오는 정신은 크게 세 가지다. 자주와 독립, 정의와 인도, 평등과 평화가 그것이다. 이는 하나 된 민족을 전제로 한 것이라서 지금의 분단체제가 극복되지 않는 한 온전히 성취될 수 없다. 우리의 역사적 과제인 민주화 사회정의 평화통일 모두 3·1정신 속에 내포돼 있다.”

-기독교가 주도한 3·1운동이고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을 넘어 천도교 불교와도 소통했다. 3·1운동의 신학적 의미는 어떻게 봐야 하나.

“교회 현실 참여의 본보기, 역사 참여의 본보기, 정치 참여의 본보기로 봐야 한다. 3·1운동 이전까지 선교사와 한국교회는 막 싹이 튼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교리처럼 가르쳐 왔다. 그러나 이건 올바른 태도가 아니었다.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이웃에 대한 책임 문제가 대두되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적 이념을 초월해 다른 교파는 물론 다른 종교까지 포용하고 협력했던 당시 한국교회 지도자들,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 정의와 평화, 후손들의 행복을 위해 과감하게 일어섰던 믿음의 선배들의 정신이 지금 우리에게도 꼭 필요하다.”

-2·8 독립선언 100주년이 임박했다. 역사적 의미는 어떤가.

“재일본동경조선청년독립단 대표 최팔용 윤창석 등 11명의 이름으로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발표한 것이 2·8 독립선언서다. 이는 3·1 독립선언의 선구요 촉진제였다. 종래 잘못 알려진 ‘무오독립선언서’를 대체해 2·8 독립선언서가 세계 만국에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밝힌 최초의 선언서다. 3·1 독립선언서를 구하지 못한 곳에서는 2·8 독립선언서를 대신 등사해 사용한 경우도 있었다.”

-3·1운동 당시 선교사들의 역할,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다음 달 3·1운동 관련 선교사 자료를 번역해 출간한다. 3·1운동을 준비하던 사람들은 거사 전에 서구 선교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선교사들을 사랑하고 배려했기 때문이다. 사전에 일제에 알려질까 우려했을 수 있고 엄격한 정교분리를 강조하던 선교사들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 했을 수 있지만 선교사들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 있다는 것도 고려했을 것이다. 1919년 2월 28일 저녁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3학년 이용설이 스승 프랭크 W 스코필드 박사에게 직전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건네며 영어로 번역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 달라고 하고, 3월 1일 오전 세브란스병원 약제사 이갑성이 스코필드에게 오후 2시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 계획을 알리며 사진을 찍어 외신에 알려달라고 부탁한 것은 예외적인 사례였다.

실제 3·1운동이 일어나자 선교사들은 깜짝 놀랐다. 대부분 선교사는 ‘만행에 중립은 없다(No neutrality for brutality)’는 구호 아래 뭉쳤다. 총칼로 비인도적 탄압을 하는 일본을 비난했고 평화적 만세시위를 하는 한국인을 동정했다. 뿐만 아니라 비밀리에 편지와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실상을 가족 친지 선교본부 등 해외에 알리고 대책을 마련했다. 3·1운동의 공정한 목격자와 증인으로 역할을 한 것이다. 선교사들이 남긴 편지 보고서 기고문 일기 등 자료는 날이 갈수록 가치를 더하고 있다.”

-기독인 민족대표 16인 열전 출간도 앞두고 있다.

“기독교인 민족대표 가운데 출옥 후 변절한 사람은 정춘수와 박희도뿐이다. 나머지 대표들은 일제의 감시 때문에 독립운동 일선에 다시 뛰어들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김병조 목사는 임시정부에 직접 참여해 독립운동을 계속한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전문가에게 맡겨 집필한 기독교인 민족대표 16인 열전이 곧 출간된다. 공정한 시각으로 읽기 쉽게 지은 책인 만큼 한국교회 성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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