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성(城)’이 아니라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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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꿰뚫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시고자 하셨던 핵심 메시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라는 숙제가 주어진다면, 그 주관식 답안에 어떤 한 줄을 채워 넣어야 할까? 기독교사회윤리학자인 나로서는 이런 답안을 제출할 것 같다. “성이 아니라 사람을 건설하며 살아라.” 바벨탑의 교훈이 그랬고 무너진 여리고성 터에서 여호수아가 전한 메시지가 그러했으며, 왕궁을 짓고 자신의 권력 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던 이스라엘 왕들을 향한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그러했다. 또한 성전이라는 큰 ‘성’을 만들고 그 안에서 제의를 독점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착취하는 유대 제사장들을 향한 예수님의 날 선 비판도 결국은 그 말씀이었다. 예수께서 ‘곧 도래한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아버지 되시고 사람들은 모두 형제자매가 되는 관계적 혁명의 나라였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교회의 원리를 이렇게 요약했다. “서로를 건설하며 사십시오.”(살전 5:11) 이때 바울이 사용한 동사 ‘오이코도메오’는 ‘construct’ ‘build up’의 뜻이다. 우리는 벽돌을 쌓고 콘크리트를 위로 올리며 건물을 건설할 수도 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든든하고 깊게 하면서 관계를 건설할 수도 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은 단연코 후자다.

그런데도 사람은 바벨탑을 짓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자기만의 성을 건설하는데 몰두한다. 높이 쌓기 위한 가장 안전한 구조는 피라미드 방식이다. 땅에 지지하는 면적이 넓을수록 더욱 높게 올릴 수 있으니 말이다. 하여 이 건축방식을 깨달은 ‘호모 사피엔스’는 아직까지도 아주 소수만 꼭대기를 차지할 수 있는 피라미드식 사회를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SKY캐슬’에도 피라미드는 중요한 메타포로 등장한다. 극 중 자수성가형 가장인 차민혁 교수네 거실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조형물이다. 세탁소집 아들이었다는데, 열심을 다해 공부한 덕분에 유명 사립대 로스쿨 교수라는 입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피라미드식 사고 구조 속에서 차 교수의 자리는 아직 꼭대기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오르지 못한 최고의 정점을 자녀들이 차지하기 원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녀들의 최고 성적을 위해 노력하는 아빠다. 그러던 어느 날, 내신 성적을 위해 입수한 족집게 자료를 아들들이 반 친구들과 공유한 사실을 알게 되자 차 교수는 핏발 서린 얼굴로 소리쳤다. “그 아이들은 네 친구가 아니라 적이야. 전쟁터에서 적에게 총알을 나누어주는 것은 자살 행위야!”

나보다 높이 오르려는 경쟁자들을 다 물리치고 정점에 올라가려면 사람을 친구나 동료로 보지 말라고 가르치는 세상이다. 하여 무한경쟁, 적자생존, 승자독식의 세상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더 빠르고 더 강하고 더 기민한 생명이 덜 빠르고 덜 강하고 덜 기민한 생명을 잡아먹는 먹이사슬, 그것은 정글의 법칙이다. 아니, 적자생존의 정글에서조차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은 없다. 오직 사람만이 배불리 먹고도 훗날을 위해, 또 자손으로 이어지는 자기 확장을 위해 축적하고 축적한다. “가옥에 가옥을 더하고 토지에 토지를 더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채 말이다. 드라마는 차 교수 못지않게 승자독식의 세상을 가르치는 어른이 한 사람 더 등장한다. 학생부종합이라는 수시 전형을 전문적으로 준비해주는 학습 코디네이터 김주영 선생이다. 그는 극 중에서 자신이 코디하는 학생의 성적을 위하여 다른 학생 하나를 청부 살해했다. 드라마적 장치가 극대화되어서 그렇지 설마 사람들이 그럴까. 이렇게 반문하던 와중에 최근 대학에 합격한 뒤에 친구들끼리 떠난 여행에서 사고사를 당했다는 안타까운 기사를 읽다가 댓글을 보고 경악했다. 예비번호를 받은 학생의 댓글인 듯싶었다. 한 자리 비워주고 가서 고맙다는. 때가 급하다. 우리의 “맏아들과 막내아들을 잃기 전에”(수 6:26) 서둘러 움직여야 한다. 성이 아니라 사람을 건설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백소영 (강남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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