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정동제일교회, 목사부터 성도까지 온몸으로 항거하다

<2부> 독립운동과 한국교회 (2) 이필주 목사와 정동제일교회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정동제일교회, 목사부터 성도까지 온몸으로 항거하다 기사의 사진
송기성 정동제일교회 목사가 지난 8일 서울 중구 교회의 벧엘예배당에서 이필주 목사가 설교했던 강대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송지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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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덕수궁 뒤편 정동제일교회(송기성 목사) 안마당.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현충시설인 ‘정동교회 이필주 사택 터’가 표지판으로 남아있다. 1919년 2월 27일 당시 기와집이던 정동제일교회 이필주(1869~1942) 목사의 사택에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인 대표 16인의 명단이 최종 확정됐다. 당시 분위기에서 민족대표는 내란죄를 뒤집어쓰고 처벌될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28일에는 3월 1일 현장에서 배포할 독립선언서가 이 목사의 사택 안방에서 세브란스의전과 보성학교, 중앙학교의 학생 지도부에게 전달됐다.

지난 8일 취재진에게 현장을 안내한 이 교회 송기성 목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을 불사하고 행동하는 신앙을 보여준 분들의 회합 장소”라며 “목회자로서 신앙의 양심을 갖고 하나님 영광을 위해 모든 걸 헌신한 선배들께 깊은 감동을 받는다”고 말했다. 정동제일교회는 1970년대까지 이필주 목사 사택을 보존했지만, 사회교육관을 새로 지으면서 터만 남겨 오늘에 이른다.

이 목사는 독립선언서에 길선주 목사와 함께 각각 감리교와 장로교를 대표하는 어른으로 먼저 이름을 올렸다(국민일보 1월 1일자 33면 참조). 가나다 차례보다 앞서 나오는 건 연장자이기도 했지만, 독립선언서 작성 당시 ‘먼저 죽을 순서’를 염두에 둔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거사 전에 천도교와의 연합 문제에 대해 일부 목회자들이 반대하자 이 목사와 이승훈 장로, 오하영 목사 등은 함께 “우리는 이 기회에 종교와 관계없이 국민의 자격으로 할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3·1운동을 종교와 계층을 넘어선 민족운동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 목사는 행동하는 목회자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까진 “소고 장고 두드리며 노래하고 춤추기와 택견하고 편싸움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고 본인이 직접 회고록에 적었다. 1890년 군대에 들어가 직업군인 생활을 하다가 1902년 전염병으로 두 어린 자녀를 잃고 낙심하던 중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왔다. 1903년 군대생활을 청산하고 교회 예배당 청소부터 시작해 신앙 훈련을 받았다. 1915년 북감리회 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918년 6월 정동제일교회 5대 목사로 부임했다. 이 교회 전임자인 3대 현순 목사와 4대 손정도 목사 역시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각각 외무차장과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했다.

박동완(1985~1941) 당시 전도사도 정동제일교회 소속으로 민족대표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배재학당에 다니며 정동제일교회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접했다. 감리교단의 미션 스쿨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사이에 위치한 정동제일교회는 이들의 채플 역할을 했다. 박 전도사는 당시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 신문인 기독신보의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3·1운동으로 2년여의 옥고를 치른 후엔 일제의 감시 탓에 드러내놓고 독립운동을 하진 못했으나 중앙YMCA에서 ‘천국이 근(近)하리라’와 같은 강연 활동을 이어갔다. 박 전도사는 일제의 표준시간에 맞춰 살지 않겠다며 자신의 시곗바늘을 30분 늦춰 놓고 다녔다고 한다. 1928년 미국 하와이주 오아후의 한인기독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해 이승만 전 대통령과 함께 하와이 현지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송 목사의 안내로 19세기 교회건물인 벧엘예배당에 들어섰다. 벧엘예배당은 교회 창립 10주년인 1895년 건축을 시작해 1897년 12월 26일 봉헌식을 했다. 전면부엔 1918년 한국에서 최초로 도입된 파이프 오르간이 100년 넘게 성도들을 맞이하고 있다.

“저 파이프들 뒤편에 어른 여럿이 들어갈 수 있는 송풍구 공간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3·1운동 직후 지하 ‘독립신문’이 8호까지 비밀리에 제작됐습니다. 일경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공개적인 시위가 불가능해지자 유인물 배포에 집중한 겁니다. 오르간 소리가 철필 긁는 소음을 덮어주었지요.”

송 목사가 오르간 옆 100년 넘은 목재 강대상으로 이끌었다. 그는 “이 목사도 이곳에 서서 말씀을 전했다”고 말했다. 강대상 가운데에는 한자로 ‘信望愛(신망애)’라고 새겨져 있다. ‘믿음’ ‘소망’ ‘사랑’을 뜻한다.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1920년 9월 사망하자 그의 시신을 거두어 그해 10월 14일 장례식을 거행한 장소도 이곳 벧엘예배당이다.

3·1운동으로 정동제일교회가 입은 피해는 막심했다. 민족대표였던 이 목사와 박 전도사는 물론이고 김진호 전도사 등 다른 교역자와 배재학당 및 이화학당 학생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예배를 인도할 사람이 없었다. 봄에서 가을까지 6개월 넘게 사실상 문을 닫아야 했다. 2011년 발간된 ‘정동제일교회 125년사’는 1917년 2283명이던 교인 수가 1920년 1119명으로 절반 넘게 줄었다고 밝혔다.

이 책을 집필한 오영교(연세대 역사학 교수) 장로는 “목사나 일부 청년들이 3·1운동에 가담한 교회들은 있으나 정동교회처럼 담임목사와 전도사, 청년회 배재학당 이화학당 학생들 등 교회 구성원 전체가 참여한 사례는 드물다”고 했다. 오 장로가 이끄는 교회의 3·1운동 100주년 기념위원회는 상반기 내에 ‘3·1 운동과 정동교회’ 간행물을 출판할 예정이다. 오 장로는 “일제 강점기 교회가 신앙과 주체성을 유지하고자 했던 노력들을 소상히 알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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