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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포럼-이재열] 시선을 끄는 힘

[여의도포럼-이재열] 시선을 끄는 힘 기사의 사진
한국전자IT산업융합전시회에 초연결사회 구현할 제품들 선보였지만
전략 부족으로 기대만큼 눈길 못 끌어
국내 기업들, 세계 첨단 기술·역량 갖췄지만
정부의 ‘미래를 보는 상상력과 철학 빈곤’ 탓에 제대로 펼치지 못할까 걱정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을 것. 미래에 대한 꿈과 진보의 희망을 말하되 구체적인 기술로 보여줄 것. 이것이 박람회의 ‘가시성’이 담고 있는 철학이자 세계관이다. 각 나라의 과학기술 수준을 보여주고 미래기술의 발전 전망을 보여주는 전시장인 박람회에 한국이 처음 참여한 것은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였다. 6개월간 3000만명이 몰린 이 박람회의 주제는 ‘미국의 기술발전과 세계의 미래’였다. 전기와 휘발유 엔진이 등장했지만, 라이트 형제가 아직 비행기를 소개하기 전이었는데, 미국 신문협회는 각 분야 엘리트들의 의견을 모아 ‘인류가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미국이 세계의 초강대국이 되는 100년 후 세상’을 꿈꾸었다.

이 박람회에 고종이 파견한 10여명의 대원이 기와집으로 25평 전시실을 지어 농산물, 짚신, 비단, 가죽 신발, 연, 도자기, 자수 병풍 등을 진열했다. 그러나 현지 신문들은 일본 전시실의 40분의 1에 불과한 조선관이 ‘장난감 같다’고 평했고, 박람회를 참관한 윤치호는 ‘가슴이 메었다’고 일기에 적었다.

7년 준비 후 고종은 민영찬을 한국관 위원장으로 임명해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파견했다. 디젤엔진, 유성영화, 에스컬레이터, 녹음기 등의 첨단기술이 넘쳐난 이곳에서 대한제국은 경복궁 근정전을 재현한 전시관을 설치하고 비단, 놋그릇, 도자기, 칠보 등의 공예품과 악기, 옷, 가구를 진열했다. 그러나 ‘심히 보잘것없어 찾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탄한 민영찬의 고백처럼 세계인의 시선을 끌 힘이 대한제국에는 없었다.

‘시선을 끄는 힘’을 상품 소비와 우월한 근대성의 통치기반으로 적극 활용한 것은 일본이다. 서양의 박람회를 본떠 내국권업박람회(內國勸業博覽會)를 정기적으로 개최했고, 비교와 선별의 수단으로 조선과 대만을 타자화했다. 1903년 오사카와 1907년 도쿄 권업박람회에서 한국인을 전시해 구경거리로 삼았다. 대한매일신보(1907년 6월 21일)는 ‘오호통재라. 일본 박람회 중에 아프리카 토인종도 출품물이 되어 진열함이 없었거늘 무슨 이유로 일본인이 우리나라 동포를 출품하고 동서양 각 국인에게 관람료를 취하느뇨’라고 분개했다. 한·일 합병 5년 후인 1915년 9월에는 경복궁 전각 200개를 허문 자리에 거대한 근대적 전시관을 짓고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해 식민통치의 정당성 홍보에 적극 활용했는데, 개막식에만 2만명, 51일간 120만명의 구경꾼이 몰렸다.

100여년을 건너뛴 2019년 1월 29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개막해 31일까지 열린 한국전자IT산업융합전시회에는 시선을 끄는 흥미로운 제품이 많았다. 세계적 기술의 최전선에 서 있는 삼성전자, LG전자, SK텔레콤, 네이버랩스를 비롯한 국내 대기업과 여러 중소기업의 첨단제품과 기술이 놀라웠다.

‘동대문CES’에서 본 것은 코앞으로 다가온 초연결사회다. 세계 최초로 5세대(5G) 주파수를 송출한 한국답게 초고속, 초연결, 초저지연의 5G 이동통신 관련 장비들이 흥미로운 상상을 촉발했다. 4G 이동통신(LTE)에 비해 20배 빨라서 3GB 영화 한 편을 1초에 다운로드하는 속도로 사물이 서로 연결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초고속으로 연동된 자동차들은 자율주행의 새로운 장을 열고, 인간적 실수로 인한 충돌사고를 최소화하고 편의성을 극대화할 것이다. 인공지능(AI)으로 매개된 로봇, 가전제품, 주택, 자동차는 인간의 생산활동, 가정생활, 건강과 여가 등에서 현실과 초현실을 서로 매개할 것이다.

선명함의 극치를 보여준 삼성전자의 8K QLED 영상기기나 레고처럼 연결할 수 있는 마이크로 LED 모듈, LG전자의 롤러블 TV 등은 최첨단에 와 있는 우리나라 기업들의 기술 역량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나 현실을 생각하니 걱정도 되었다. 개념설계에서 실행능력까지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 출품된 제품들인데,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해 이런 시행착오를 허용할 제도적 지원책은 준비되었는지, 스타트업의 혁신역량을 산업화할 최선의 방안은 무엇인지, 5G 이동통신의 기술을 어떻게 세계표준으로 만들 것인지, 신기술을 옥죄는 규제를 샌드박스만으로 풀 수 있을지 등.

가장 걱정되었던 것은 주최 측인 정부의 ‘미래를 보는 상상력과 철학의 빈곤’이었다. 새로운 기술을 선보일 장을 마련한 것은 긍정적 시도였으나 누구에게 어떻게 보여줄지에 대한 고민은 적어 보였다. 세계 160개국 4500개 이상의 기업이 참여해 전 세계 바이어를 몽땅 끌어 모은 세계 최대 라스베이거스 가전제품박람회(CES)가 폐막한 직후 불과 열흘 만에 조직하다 보니 사전 홍보가 부족했고, 전시관 하나에서 진행한 행사장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조명하기에 너무 협소했다. 정작 우리 기업은 윤치호와 민영찬의 눈물을 닦아줄 기술 역량을 준비했는데.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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