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14~16일 미국에서 처음으로 ‘대한독립’을 선언하다 기사의 사진
1919년 4월 16일 제1차 한인회의를 마친 참가자들이 필라델피아 시가행진을 마치고 미국 독립기념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 검은 모자를 쓰고 태극기를 든 여성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이 서재필 박사다. 서재필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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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1부> 임정 27년간의 흔적을 찾아 ⑦·끝 100년 전 그들이 꿈꿨던 조국

100년 전 대한독립의 외침을 기억하는 극장이 필라델피아 도심에 아직도 서 있다. 미국은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미국 독립의 성지인 필라델피아에 대한독립의 역사도 함께 묻어 있는 것이다.

1919년 3월 1일 한반도에서 터져 나온 독립의 목소리는 9일 만에 미국 땅을 밟았다. 독립운동가였던 현순 목사가 중국 상하이에서 3·1운동 소식을 듣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했던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3월 9일 급히 전보를 쳤다. 미국 교민사회는 감동과 흥분에 휩싸였다.

그 결과물이 ‘제1차 한인회의’였다. 3·1운동이 미국으로 확산된 것이다.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사흘 동안 1차 한인회의가 열렸다. 1차 한인회의는 미국 땅에서 처음으로 대한독립을 선언했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정한경 등이 주도했다.

1차 한인회의는 당시 필라델피아의 리틀극장에서 열렸다. 지금은 극장 이름이 ‘플레이 앤드 플레이어스 극장’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연극과 뮤지컬 등이 무대에 오르고 있다. 극장 정문 옆에는 “1919년 4월 14∼16일, 독립지사들이 이곳에 모여서 ‘제1차 한국의회’를 열어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선포했다”는 기념표지판이 한글로 붙어 있다.

지난 13일(현지시간) 마이크 코널리 극장 부대표를 만났다. 코널리 부대표는 “이 극장에서 한국이 독립을 외친 지 이제 100년이 됐다”고 반갑게 맞았다. 그러고는 “직접 안내해 주겠다”면서 극장 곳곳을 설명했다. 무대가 가운데 있고, 1·2층에 객석이 있는 소극장이었다.

코널리 부대표는 “우리 극장이 한국 독립운동에 있어 중요한 장소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전했다. 1911년 필라델피아에 지어진 이 극장은 100년 전 대한독립의 목소리를 간직한 채 아직도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1차 한인회의는 독립운동가 서재필 박사와 떼어놓을 수 없다. 서재필은 1948년 펴낸 자서전에서 “3월 1일의 대한독립 만세라는 우렁찬 소리는 한라산을 넘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했다”고 묘사했다. 그러면서 “나는 필라델피아에서 이 소식을 접했다. 조선의 독립운동이 이같이 급전직하로 진전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메스를 버리고 시험관을 내던진 채 밖으로 뛰쳐나왔다”고 회상했다.

재미 한국인 150여명이 1차 한인회의에 참석해 대한독립을 외쳤다. 당시 한국 교민이 많이 살았던 하와이를 제외하고, 북미 지역 전체에 거주했던 한국인 숫자는 1000명으로 추산된다. 북미에 있던 한인들이 생업을 팽개치고 대한독립을 외치기 위해 필라델피아로 모여든 것이다. 150명이라는 숫자에는 뜨거운 독립의 열기가 응축돼 있다.

지난 14일 필라델피아의 서재필기념관에서 만난 최정수 서재필기념재단 회장은 “1919년 1차 한인회의에 미국인 목사들과 가톨릭 인사, 유대교 인사 등 인근에서 활동했던 미국인 종교지도자들도 대거 참여해 대한독립을 위해 연설했다”면서 “서재필 박사의 인맥으로 가능했던 일”이라고 설명했다.

1차 한인회의에서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결정들이 내려졌다. 특히 거의 같은 시간, 지구 반대편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지한 것은 매우 중요한 대목으로 평가받는다. 1919년 4월 13일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세워졌고, 1차 한인회의가 4월 14∼16일 열린 것을 감안하면 임시정부 탄생과 동시에 지지를 천명하고 나선 것이다. 1차 한인회의의 결정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둘러싼 논란을 차단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태극기를 앞세웠던 시가행진도 빼놓을 수 없다. 1차 한인회의를 마친 참가자들은 4월 16일 태극기를 들고 필라델피아 시내를 행진했다. 이날은 비가 내렸지만 참가자들은 1차 한인회의가 열렸던 리틀극장에서 미국 독립기념관까지 2.3㎞를 걸었다. 필라델피아 시장은 군악대를 보내주는 등 시가행진을 도왔다. 당시 미국사회의 한국에 대한 무지와 일본의 조직적인 반대를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였다.

1차 한인회의 사진을 보면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남녀 차별이 재미 독립운동 사회에선 많이 사라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1차 한인회의는 미국에서 독립운동 열기를 불붙이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침체돼 있던 교민사회는 대한독립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 서재필은 3·1운동 소식을 미국에서 전해 듣고 “내가 조선을 떠날 때는 조선 백성이 죽은 백성인줄 알았는데, 3·1운동으로 산 백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조선은 자주독립하리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말했다.

1차 한인회의가 성공적으로 끝난 직후인 1919년 4월 말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 대한민국 통신부를 세웠다. 대한민국 통신부는 월간 영문출판물인 ‘코리아 리뷰’ 등을 발간하면서 대한독립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을 미국 내에서 조성시키기 위해 애썼다. 대한민국 통신부는 이승만이 1919년 8월 워싱턴에 세운 구미위원부에 통합된다. 코리아 리뷰는 재정 문제로 1922년 7월호를 끝으로 발간되지 못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통신부는 3·1운동 이후 미국 내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선전기구로 평가받는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대한민국 통신부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통신부가 위치했던 곳엔 여행사가 들어섰다.

1차 한인회의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것은 서재필의 영향 때문이었다. 필라델피아는 서재필의 근거지였다. 독립운동가였고, 의사였으며, 문구점을 운영했던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서 유명인사였다. 지금도 필라델피아 지역에는 서재필기념재단과 서재필기념관이 있다. 서재필기념관은 지상 2층 건물로, 말년까지 살았던 집을 개조해 만들었다. 그가 영어 단어를 공부했던 노트를 비롯해 여러 사진과 자료가 전시돼 있어 독립운동가 서재필의 인생을 되새길 수 있는 역사 공간이다.

서재필기념재단과 한인회는 1차 한인회의 100주년을 맞아 올해 4월 12일부터 14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국가보훈처와 뉴욕 총영사관, 세종연구소, 필라델피아 시정부·시의회가 후원한다. 4월 12일엔 1차 한인회의가 열렸던 플레이 앤드 플레이어스 극장에서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13일엔 극장에서 미국 독립기념관까지 ‘3·1운동 만세 시가행진’도 재연된다. 필라델피아 경찰은 100년 전처럼 도로 통제 등 도움을 제공한다.

필라델피아=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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