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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만세운동에 함께하면 독립될 거란 생각에 기쁘게 참가”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이화학당 학생들 재판 기록 국민일보 단독 입수해 분석해보니

[단독] “만세운동에 함께하면 독립될 거란 생각에 기쁘게 참가” 기사의 사진
이화학당 학생들이 1910년쯤 서울 정동의 학교 본관 앞에서 교사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1886년 설립된 이화학당은 3·1운동의 열기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산파이자 독립운동의 요람이 됐다. 이화여대 제공
“펑”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의 굉음이 1919년 3월 1일 적막에 싸여 있던 이화학당 교정을 갈랐다. 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기숙사에 있던 학생들이 뛰어나왔다. 담장 밖에서 움트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맨 처음 만난 건 교문을 막고 서 있던 룰루 프라이 학당장이었다. “여러분의 안전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나가면 큰일 납니다.” 막는 자와 나가려는 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지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나갈 겁니다.” 절규에 가까운 호소였다. “내 시체를 넘고 가세요. 살아서 학생들이 당하는 참변을 볼 수 없습니다.” 학당장도 물러설 뜻이 없었다. 학생들은 결국 담을 넘어 본대가 있던 탑골공원으로 향했다.

이날 만세운동에 가담했던 이화학당 교사와 학생들 상당수는 일경에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이들 중 노예달 유점선 신특실 등 주동자들의 재판기록을 최근 국민일보가 단독입수했다. 이덕주 전 감리교신학대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작성한 논문 ‘3·1운동과 이화학당’을 다음 달 15일 이화여대에서 열리는 ‘3·1운동과 이화, 여성’ 학술대회에서 발표한다.

학당장의 만류를 뒤로하고 거리로 나섰던 학생들은 판사의 질문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답했다. 유점선은 6월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시종 단호했다. “만세운동에 참여하면 독립될 것으로 생각해 기쁜 마음으로 참가했습니다. 독립이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홀로 서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착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 교수는 10대 학생들이 이처럼 당당했던 이유를 이화학당의 교육에서 찾았다. 이 교수는 17일 “이화학당이 추구했던 ‘근대 여성의식’과 ‘민족의식’ 교육이 학생들을 훌륭하게 길러냈다”면서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고 교육받은 학생들은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일에도 주역으로 참여하고 싶어했다”고 밝혔다.

같은 날 재판을 받았던 신특실도 판사의 질문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판사가 일본이 10년 가까이 은혜를 베풀고 있지 않냐는 취지로 묻자 “이처럼 속박을 당하고 자유가 구속돼 있는데 무엇이 은혜인가”라면서 “만세를 부르는 것까지 간섭받고 있다. 만세를 부르는 것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따졌다. 배후 세력을 의심하는 판사에게는 “학식이 넓어짐에 따라 사상도 깊어져 자연스럽게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며 의혹을 일축했다.

가장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노예달은 “누가 가르쳐 준 게 아니다. 여러 가지를 배운 결과 혼자 생각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면서 “앞으로도 이런 운동이 있으면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자가 이런 일에 왜 참여했냐고 묻자 “남자나 여자 모두 독립은 기쁜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응수했다.

뜻을 굽히지 않았던 이들은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학생들은 온갖 가혹 행위를 당하면서도 독립을 향한 열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들이 재판을 받는 중 이화학당은 독립의 열기를 전국으로 확산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총독부의 임시휴교령이 촉매제였다. 3월 10일부터 학교가 문을 닫자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품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유관순은 천안, 손진실은 평양, 김복희는 아산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이 교수는 “이화학당의 휴교는 ‘독립 디아스포라’를 양산하는 계기가 됐고 구속됐던 학생들의 복귀는 이화를 독립운동의 요람으로 만들었다”면서 “애국부인회와 YWCA 창립을 이화 출신들이 이끌었고 임시정부도 지원했다”고 평가했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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