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배병우] 슬로벌라이제이션의 시대 기사의 사진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이름 붙이는 능력은 유명하다. 이는 1주일간의 복잡다기한 사건 중에서 헤드라인 하나를 선정해 집중해야 하는 주간지의 특성과 관련이 있겠다.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현상을 정확히 규정하고 이를 짧고 잊히지 않는 용어로 만드는 이코노미스트의 능력은 탁월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가장 최근의 예는 지난 1월 24일자 표제어로 내세운 슬로벌라이제이션(Slowbalisation)이다. 세계화로 번역되는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sation)의 시대가 끝나고 부상하는 새로운 세계경제 패턴을 가리키는 용어다. ‘느린(slow)’과 글로벌라이제이션의 합성어다.

냉전이 끝난 1990~2010년이 세계화의 황금기였다. 2007~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고비로 세계화의 동력은 현저히 약화됐고 이후 슬로벌라이제이션으로 넘어가고 있다. 재화의 이동 비용이 더 이상 하락하지 않으며, 다국적 기업이 금융시장 변동성 때문에 현지 기업에 밀리며, 경제활동에서 국경을 넘기 어려운 서비스산업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포퓰리즘 정치의 부상도 주요한 원인이다. 슬로벌라이제이션의 증거는 넘쳐난다. 금융위기 무렵부터 지난해까지 교역, 자본 회전, 투자·대출, 인력·정보 교류 등 12개 세계화 연관 지표의 변화를 분석한 결과 8개에서 세계화 수준 후퇴가 감지됐다. 슬로벌라이제이션은 경제 교류 범위를 인근 지역으로 좁히는 ‘블록화’로 현실화하고 있다. 북미 아시아 유럽은 공급체인을 각 지역에 보다 인접한 곳으로 옮기고 있다.

하지만 새 세계에 대한 이코노미스트의 예측은 비관적이다. 슬로벌라이제이션은 두 가지 큰 약점이 있다. 보다 지역으로 통합된 무역시스템과 월가와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주도하는 세계 금융체제 간 긴장이 불가피하며 이로 인해 개발도상국의 선진국 진입은 훨씬 어려워질 것이다. 저숙련노동자의 실직, 난민 갈등 등 세계화가 낳은 문제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슬로벌라이제이션을 ‘느린 세계화’로 풀어 사용하지는 않는다. 세계화의 아종이나 분파보다는 세계화와 대비되는 새 추세로 본다. 연속성보다는 단절에 방점을 찍는다. 한국 기업과 정부도 세계화가 이어지고 있다는 자기 안주보다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는 단절감을 갖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

배병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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