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남혁상] 미국은 새 말을 살 수 있을까 기사의 사진
워싱턴 외교가엔 ‘같은 말(馬)을 두 번 사지 말라(Don’t buy the same horse twice)’는 격언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의 협상가들이 옛 소련과 협상했던 과정을 연구한 존 도빈의 논문에 등장한 이 말은 이후 협상가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문장이 됐다. 길고 지난한 협상 과정에서 상대방이 과거의 합의를 다시 끌고 나오는 전략에 속지 말자는 의미다. 냉전 이후 이 격언은 이제 옛 소련이 아닌 북한과의 협상 과정에서 주로 쓰이게 됐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는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1박2일 담판을 바라보는 미국 분위기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냉정히 보면 회의론뿐이다. 지난해 6월 역사적인 첫 북·미 정상회담 직전에는 그래도 미국 조야에선 낙관론과 비관론이 교차했다. 반세기 넘게 적성국이었던 양측 정상이 처음 만난다는 평가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미국 정보당국과 안보전문가, 의회, 언론이 사실 회의론 또는 비관론 쪽에 서 있다.

그렇다면 왜 이번 정상회담은 회의론이 많을까. 트럼프 대통령의 도를 넘는 자화자찬, 성과 부풀리기에 대한 반작용 탓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미국의 여론주도층이 가지고 있는 북한에 대한 신뢰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다. 실제로 미국 조야에선 ‘북한은 믿을 수 없는 상대’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최소한 25년간 반복돼 왔던 북·미 간 많은 합의와 파기의 역사 때문이다.

1차 북핵 위기가 불거지자 미국은 1994년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핵 동결 대가로 경수로 2기 및 중유를 지원하기로 했다.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완전 복귀, 모든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허용, 핵 활동 전면 동결 및 기존 핵시설 해체를 약속했다. 연락사무소 설치 조항도 합의에 포함됐다. 하지만 북한은 제네바 합의가 플루토늄을 통한 핵 개발 중지를 명시했다는 점을 노리고 비밀리에 고농축우라늄(HEU)을 통해 핵무기를 개발했다. 이른바 2차 북핵 위기다.

북핵 6자회담 최대의 성과물인 9·19공동성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북한은 현존하는 모든 핵무기 및 핵프로그램 포기, NPT 및 IAEA 복귀 등을 약속했다. 미국은 평화협정 체결 논의를 제시했다. 하지만 북한은 1년도 안 돼 첫 핵실험을 감행했다. 2008년 북한은 영변 핵시설 냉각탑 폭파 쇼를 보여주면서 미국의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를 받아냈으나 이듬해 4월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했다.

미국이 북한과는 더 이상 어떠한 합의 또는 대화를 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계기는 2012년 2·29합의가 깨진 직후였다. 당시 북한은 핵실험 및 장거리미사일 모라토리엄 등을 약속했고 미국은 제재 해제 검토, 대북 영양지원을 제안했다. 하지만 두 달도 되지 않아 북한은 다시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했다. 이후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과 대화를 단절하는 이른바 ‘전략적 인내’로 대북전략을 선회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초기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절대적 목표로 내걸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그 수위가 낮아지고 있다. 핵무기 완전 폐기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폐기·반출 얘기가 나오더니 이제는 영변 핵시설 폐기에 대한 상응조치로 제재 완화 카드도 솔솔 나오는 상황이다.

어찌됐든 북·미 정상은 일주일 뒤인 오는 28일 공동성명에 합의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합의가 과연 한반도의 새로운 미래를 보장할 것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예상되는 합의는 이미 지난 25년간 모두 밥상에 올랐던 메뉴들이다. 미국이 다시 한 번 북한으로부터 같은 말(馬)을 살지, 아니면 새로운 말로 갈아탈지는 현재로선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수십년간 되풀이됐던 ‘협상-시간 끌기-도발-협상’ 수순이 이번엔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끊기기만 바랄 뿐이다.

남혁상 국제부장 hs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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