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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남진 (6) 선배 최희준의 팝송 스타일 흉내 낸 데뷔곡 실패

음악학원 1년 반 다니고 첫 앨범 “방송국서 왜 안 부르지…” 좌절, 레코드회사에서 전속 가수 제안

[역경의 열매] 남진 (6) 선배 최희준의 팝송 스타일 흉내 낸 데뷔곡 실패 기사의 사진
남진 장로(사진 왼쪽)가 1960년대 후반 가수 최희준과 함께 사진을 촬영했다. ‘맨발의 청춘’을 부른 최희준은 남 장로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65년 대학교 2학년에 다닐 때는 사회를 너무 몰랐다. 한동훈음악학원에서 1년 반을 연습하고 레코드판을 냈다. 판만 내면 방송에서 내보내주는 줄 알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방송은 나오지 않았다. 방송에 나오려면 PD와 연이 있어야 했지만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일가친척 중에 연예인도 없는 데다 관례상 PD에게 돈봉투라도 건네야 했는데 누가 얘길 해줬어야 알지 그런 건 전혀 몰랐다.




판을 만들어 준 한동훈 선생님도 고지식한 분이었다. 여학교 음악 선생님이었는데 올곧은 분이었다. 돈봉투를 생각할 분이 아니었다. 데뷔는 늦어졌지만 정통파 음악가인 한 선생님에게 제대로 음악을 배웠다는 점은 감사했다. 한 선생님은 피아노를 잘 쳤고 한국 최초의 샹송 가수라 불리던 분이었다. 휘뚜루마뚜루 가르치는 게 아니라 기초부터 잘 다지며 가르쳤다.

당시 나는 발성연습을 하는 게 참 싫었다. 발성을 모르고서도 노래를 부를 수는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한 선생님은 어떻게든 나에게 발성부터 호흡까지 기초를 가르치려 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내 음악이 흔들리지 않는 것은 한 선생님께 배운 기초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 선생님이 단순히 노래만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한 선생님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지금도 감사 드린다.

가요를 배울 때는 좋아하는 가수의 스타일도 따라서 배우게 된다. 지난해 별세한 최희준을 참 좋아했다. ‘맨발의 청춘’을 부른 최희준은 당대 최고의 스타였다. ‘종점’ ‘하숙생’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등 발매하는 곡마다 히트를 했다. 그때는 최희준의 시대였다. 최희준은 팝송으로 단련된 가수였다.

초창기 내 음악에서 최희준을 빼놓을 수 없다. 가요를 불렀다기보다는 최희준의 노래를 따라 했다는 게 맞다. 최희준이 아니었다면 가요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가요를 부르려 할 때마다 노래 자체가 삐걱거렸기 때문이다. 내 발성은 트로트 발성이라 보기 어렵다. 나훈아의 발성과도 전혀 다르다. 트로트 발성을 배우면 제대로 할 수가 없으니 팝송 스타일로 불렀다. 신인 가수들은 가요계 선배의 노래를 배워서 불러야 했던 때다. 그래야 노래를 할 수 있었다. 팝송을 불렀던 최희준의 노래를 듣고 가요가 좋아졌다.

나의 데뷔곡인 ‘서울 플레이보이’와 ‘쓸쓸한 크리스마스’가 최희준을 모창하며 부른 노래들이다. 내가 방송에서 노래를 부르니 최희준이 부르는 줄 알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최희준의 모창 가수로는 히트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너무 똑같았던 것이었다. 데뷔작은 처참히 실패했다. 좌절했다. 그러다 운명의 순간이 왔다.

1년 후 우연히 오아시스레코드에서 전속 가수 제안이 왔다. 레코드사를 찾아가 작사가 김중순을 만났다. 나보다 다섯 살 위인데 자주 만나자고 해 몇 번을 내리 만났다. 오아시스레코드는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뒤쪽에 있었다. 하루는 김중순과 중국집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 좋은 곡을 준비하니 네가 한 번 준비해 봐라”고 말했다. 대낮인데 자장면 먹고 남은 찌꺼기를 안주 삼아 빼갈(고량주)을 한참 마셨다. 그가 바로 훗날 최고의 작곡가 중 하나로 불리게 되는 김영광이었다.

정리=김동우 기자 lov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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