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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일은 교회 일과 같다”… 독립운동 조직·확산시킨 구심점

<2부> 독립운동과 한국교회 (3) 이갑성 집사와 남대문교회

“나랏일은 교회 일과 같다”… 독립운동 조직·확산시킨 구심점 기사의 사진
손윤탁 남대문교회 목사가 지난 13일 서울 중구 연세세브란스빌딩 앞에 설치된 ‘3·1독립운동기념터’ 기념비를 가리키고 있다. 기념비 근처에 교회 전신인 남문밖교회 및 이갑성이 살던 세브란스 병원 사택이 있었다. 강민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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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민족의 거사 막전막후에는 그가 있었다. 3·1운동을 앞두고 전국 각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삼남(충청·전라·경상) 지방 기독교계 대표들을 규합한 연당 이갑성(1889~1981). 민족대표 33인으로 이름을 올린 이갑성은 당시 세브란스병원 제약주임으로 근무하며 병원 구내에 있던 남문밖교회(현 남대문교회)에서 집사로 신앙생활을 했다. 그가 거주했던 병원 사택은 외국인 선교사의 거주지로 일경의 감시망을 피하는 데 용이해 거사 논의의 주요 거점이 됐다. 남문밖교회는 그가 민족대표 이승훈 및 독립운동가 함태영 목사와 독립의지를 다진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독립운동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이갑성의 흔적을 좇아 지난 13일 서울 중구 퇴계로의 교회를 찾았다.

2·8선언 소식 전하며 청년 참여 촉구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본당 1층엔 제중원부터 시작된 교회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사료실’이 자리 잡고 있다. 손윤탁 목사의 안내로 둘러본 사료실엔 호러스 알렌과 윌리엄 헤론 선교사 등 제중원 주요 인물과 역대 담임 목회자 등의 초상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세월이 고스란히 묻은 듯한 소품과 ‘남대문교회사’ 같은 교회 역사책들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들 가운데 독립운동에 참여한 교회 구성원들의 기록이 남아있다. 이갑성을 비롯해 교회 조사(助師·현 전도사)로 3·1운동을 적극 도모한 함태영(1873~1964)과 세브란스 의전생으로 3·1운동 참여 후 흥사단에 가담한 이용설(1895~1993) 장로가 그들이다. 이갑성은 세브란스병원에서, 함태영과 이용설은 각각 교회와 세브란스 의전에서 독립운동을 조직하고 전국으로 확산하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특히 이갑성은 3·1운동의 계획 단계부터 독립운동가와 학생들을 그의 집으로 모아 독립운동을 격려하는 데 앞장섰다. 1919년 2월 11일 남문밖교회에서 함태영 조사와 함께 이승훈을 만난 그는 독립운동 참가를 결의하고 이튿날 자택에 세브란스 의전생들을 모았다. 음악회를 구실로 열린 자리에서 이갑성은 일본 유학생들이 앞장선 2·8 독립선언식 등 국내외 소식을 전하며 청년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거사를 앞둔 2월 28일 이갑성은 자신이 가진 독립선언문 600매를 교회 청년 이용설 등 세브란스 의전생들에게 전달한다. 대구 마산 등지에 배포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며칠 뒤 이들 지역에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된다. 이때 독립선언문 배포에 참여했던 이용설은 훗날 당시의 상황과 소회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는 나랏일이 교회 일과 똑같았어요. …교회 교역자들이 나랏일에 참여하는 걸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남대문교회에서 협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협조하려는 생각을 일반 교인들도 갖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

3·1 만세운동 당일 이갑성은 민족대표들과 함께 서울 종로구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한 뒤 일경에 체포됐다.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그대로 있다 잡힌 것은 사전에 계획된 일이었다. 민족대표들은 거사 전 조선총독부에 미리 의견서를 제출했는데 이 일도 이갑성이 담당했다.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린 세브란스의전 교수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선교사에게 3·1운동 계획을 알린 것도 그였다. 거사 하루 전 스코필드 선교사를 만난 이갑성은 독립선언문을 건네며 3월 1일 전국에 대규모 평화시위가 열리는데 당일 현장을 사진에 담아 국제사회에 증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스코필드 선교사는 그의 부탁을 받아들여 탑골공원 등에서 벌어진 만세운동과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장면을 촬영해 전 세계에 알렸다.

이갑성은 함태영 등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들과 재판에 넘겨져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남문밖교회 성도들은 민족을 위해 옥고를 치르는 함태영 조사와 집사인 이갑성을 격려하기 위해 매주 예배를 마친 뒤 이들이 갇힌 서대문형무소 뒷동산을 찾았다. 성도들이 이들을 위해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면 감옥에서도 박수 소리가 나오곤 했다.

이러한 성원에 힘입어 이갑성과 민족대표 오화영은 20년 3·1운동 1주기 때 옥중 만세운동을 도모했다.

22년 출소 후에도 이갑성은 조국 독립에 매진했다. 출소 이듬해 민립대학 건립운동에 참여했으며 물산장려운동, 신간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이들 활동으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3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지만 37년 현지에서 체포돼 국내로 압송됐다. 이후에도 일제는 다방면의 독립운동에 가담한 그를 여러 이유로 반복 감금했다.

해방 이후에야 일경의 감시에서 벗어난 그는 정계 및 독립운동 관련 기념사업에 참여했다. 62년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고 65년엔 광복회 회장과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총재를 지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가장 장수한 그는 81년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손윤탁 목사는 “함태영 조사와 이갑성 집사, 이용설 장로 등 걸출한 민족의 영웅을 다수 배출한 남대문교회는 그동안 민족정신을 계도해 나갈 정신적 지주로서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에 힘써왔다”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나랏일을 교회 일처럼 여겼던 선조들의 정신을 한국교회가 되새기길 바란다”고 말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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