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한장희] 노덕술도 경찰이었다 기사의 사진
경찰은 지금도 그다지 시민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민주화운동 세대에겐 ‘민중의 몽둥이’ ‘독재의 앞잡이’ 같은 별칭이 여전히 생생하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 사건은 대표적인 경찰의 흑역사다.

영화 ‘암살’ ‘1987’ 등의 모티브가 된 고문경찰 계보는 일제강점기 노덕술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0년 경찰이 된 노덕술은 수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를 체포해 고문하면서 고속 승진했다. 어찌된 일인지 광복 후에도 그는 잘나갔다. 수도경찰청장이던 장택상에 의해 발탁돼 본청 수사과장으로, 경기도경 보안주임으로, 반민특위 파동 이후에는 헌병 중령으로 변신해 이른바 ‘빨갱이 사냥’에 앞장섰다. ‘노덕술 사단’의 막내는 1947년 종로경찰서 사찰계로 경찰에 입문한 박처원 전 치안감이다. 그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총 책임자로 옷을 벗을 때까지 대공 분야에서만 일했다. 그의 수제자가 김근태 전 의원을 고문한 이근안 전 경감이다.

고문경찰이 경찰 내부에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미군정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미군정은 광복 후 혼란스러웠던 남한의 치안 확보를 이유로 일제 경찰 출신 상당수를 기용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광복 직후 전체 경찰관 2만5000여명 중 일제 경찰 출신은 5000여명으로 전체의 20%였다. 미군정이 일제 경찰 출신을 채용한 이유는 서독의 사례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2차대전 후 미국과 서독 정부는 인권유린과 전쟁범죄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고 나치 비밀경찰 중 상당수를 중용했다. 당장의 동독과 소련 견제가 시급했던 나머지 경험과 기술을 갖춘 나치 잔당에게 중책을 맡긴 것이다.

경찰 내부에서 친일경찰을 청산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46년 10월 미군정의 식량수급 정책에 반발하는 ‘대구 사건’이 발발하자 미군정은 대책 마련을 위해 조미공동위원회를 개최했다. 경찰 측 증인으로 출석한 최능진 당시 경무부 수사국장은 “일제 경찰 출신, 특히 항일 애국자를 탄압·박해하던 악질 고등경찰 출신을 경무부 당국이 수사경찰의 일선에 배치한 결과 일반 민중의 반감을 사고 있으므로 이를 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수용하지 않았고, 경찰 수뇌부의 눈 밖에 나 그해 12월 파면됐다. 공개성명을 통해 다시 “청장, 서장, 간부급에서 일제 경찰 출신을 제거하라”고 요구해 반향을 일으켰지만 끝내 그는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48년 8월 정부가 수립되자 수도경찰청 고위 간부 20명이 “일제 경찰 경력을 반성하며 민족정기를 앙양하기 위해 총 사퇴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안타깝게도 좌우익이 대립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친일 경찰 청산 노력은 무위에 그쳤다.

최근 들어 경찰은 이미지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잊혀진 경찰의 뿌리를 찾는다’는 취지 아래 ‘경찰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추진단’을 꾸려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들을 발굴해 널리 알리고 있다. 특히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을 통해 자신들의 뿌리를 임시정부 경무부장을 시작으로 주석의 자리에 올랐던 김구 선생에게서 찾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경찰의 역사를 알리는 자료나 홈페이지에는 김구 최능진 등에 대한 홍보만 있지 친일 악질 고등계 형사가 광복 이후에도 득세했던 과거에 대한 처절한 자기고백은 보이지 않는다. 시민의 존중을 받는 공권력으로 거듭나는 게 쉽지 않아 보이는 이유다.

민주·인권·민생 경찰로 거듭나겠다며 시작한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은 잘못했던 과거에 대한 정확한 사실 파악과 반성이 전제돼야 한다. 치부는 가린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언제든 어떤 계기가 있으면 고문경찰의 망령은 되살아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하는 경찰관들은 더 큰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경찰의 염원인 수사권 조정도 힘세진 경찰의 인권침해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가시지 않는 한 먼 꿈일 수도 있다.

한장희 사회부장 jh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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