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광주는 80만이 한몸 된 공동체였다”

이철우 5·18기념재단 이사장 1980년 광주와 교계 상황을 말하다

“5월 광주는 80만이 한몸 된 공동체였다” 기사의 사진
5·18기념재단 이사장 이철우 목사가 19일 광주 서구 5·18기념재단에서 5월 광주를 그린 미술작품을 배경으로 인터뷰를 하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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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심상치 않으니 몸을 숨기는 게 낫겠소. 계엄군은 경찰과는 다를 거요.”

1980년 5월 16일, 정보과 형사가 조용히 알려줬지만 거짓말인 줄 알았다. 이틀 후인 18일 오후 예배가 끝난 광주 양림교회에서 계엄군과 학생들이 대치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급히 기독교 단체들이 모여있던 YWCA 건물로 달려갔다. 하지만 계엄군이 전날 교계의 주요 인사들을 연행해 간 뒤였다. 남은 사람들은 계엄군 철수 이후 항쟁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몸을 숨기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철우(68) 5·18기념재단 이사장이 기억하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시작이다. 그는 당시 국제앰네스티 광주전남지부 간사로 일했다. 이 이사장은 목회자다. 지난해 8월까지 광주 무등교회(한국기독교장로회)를 섬기다 은퇴했다. 19일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서 이 이사장을 만났다.

이 이사장은 당시를 기억하며 자신이 비겁했다고 고백했다. 1970년대부터 광주 목포 등지에서 유신 반대 운동을 펼치다 투옥된 경험이 있어 계엄군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 이사장은 “YWCA에서 의견을 모은 후 급히 양림동에 몸을 숨겼지만, 도저히 숨어있을 수 없어 시내로 나왔다”며 “그 시기에는 왜 겁먹기만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어 “5월에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누구보다 부끄럽다”며 식은 커피를 마셨다.

그는 계엄군이 발포하는 결정적인 장면도 목격했다. 이 이사장은 그해 5월 21일 오후 1시쯤 시민들과 계엄군이 대치하던 금남로에 갑자기 애국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애국가 초반에 ‘탕’ 하는 총소리가 한 번 난 후 연발로 총소리가 들렸다”며 “시민 10여명과 함께 30분을 정신없이 도망치다 한 구멍가게에 들어가 셔터를 내리고 숨었다”고 말했다. “함께 숨었던 고등학생이 ‘친구들이 죽었다. 군인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뛰쳐나가려는 걸 울면서 막았다”고 말할 때는 미간이 찌푸려졌다.

항쟁 후 이 이사장은 정신과를 찾았다. 시민군이 있던 구 도청 쪽을 하루라도 쳐다보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했다. 이후 평생을 노동자들과 함께했다. 무등교회를 개척해 ‘무등터야학’을 세우고 산업선교를 시작했다. 1997년부터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쉼터와 의료봉사에 매진해 왔다.

최근 광주민주화운동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일부 극우 인사들의 ‘북한군 600명 개입설’ ‘유공자 뻥튀기설’을 그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이 이사장은 “광주에 북한군이 왔다면 은행과 시장이 마비됐어야 하는데 본 적도 없고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오히려 그는 광주가 보여준 공동체 정신을 한국교회가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광주 80만 시민은 잠깐이나마 ‘절대 공동체’가 됐다”며 “부족한 식량을 나누고 부상자를 함께 치료하는 공동체 정신은 교회가 항상 바라던 초대교회의 모습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5월의 광주’를 기억하는 기독교인은 더 있다. 박상규 광주 성광교회 목사는 1980년 목포에서 집회를 하다 체포된 후 모진 고문을 겪었다. 박 목사는 “이념적 시각으로 광주의 진실을 왜곡하거나 오도해선 안 된다”며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명예를 존중할 수 있는 길은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는 것뿐”이라고 강조했다.

광주=황윤태 기자 trul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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