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남진 (8) ‘울려고 내가 왔나’ 인기 폭발하자 전국 순회공연

1968년 ‘마음이 고와야지’ 엘비스 창법으로 춤추며 노래… 10대 소녀팬 ‘오빠 부대’ 탄생

[역경의 열매] 남진 (8) ‘울려고 내가 왔나’ 인기 폭발하자 전국 순회공연 기사의 사진
1966년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발매한 '울려고 내가 왔나' 레코드판. 당시 무명 가수였던 남진 장로는 아랫줄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이 앨범으로 남 장로는 일약 스타가 된다.
목포 바다는 포근했다. 가수는 폐가 생명이다. 어릴 때 목포에서 자주 수영을 했던 게 가수로서 큰 도움이 됐다. 냇가에서 ‘개헤엄’을 잘했다. 호남에서 납세자 순위 1위였던 아버지에겐 요트가 있었다. 아버지는 요트를 타고 여름이면 바다를 다녔다. 내가 지금 하루 70곡을 부를 수 있는 것은 어릴 적 바닷사람이었던 덕분이다.



겨울이 왔다.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불러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 성북구 종암동에 살 때였다. 아들이 걱정됐던 어머니도 서울에 잠시 올라오셨다. “가수로 뜨고 있었는데 곡이 금지됐습니다”라는 말은 아들로서 참 하기 힘든 말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 금일봉을 주었다. 그러곤 ‘울려고 내가 왔나’라는 곡이 참 좋더라고 말씀해 주셨다.

사실 ‘울려고 내가 왔나’보다 ‘연애 0번지’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곡이었다. 하지만 금지곡이 됐으니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머니의 위로에 용기를 얻어서일까. 다시 방송국에 가서 “이 트로트를 틀어주십시오”하고 부탁했다.

‘울려고 내가 왔나’는 이전의 트로트와 조금 달랐다. 딱히 정의하자면 ‘팝뽕짝’이다. 팝송 같으면서도 트로트 같은 노래였다. 그런데 그 곡이 당시 최고의 히트곡이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PD들 사이에선 나에 대한 동정여론도 있었던 것 같다. 신인가수가 애써 준비한 노래가 금지곡이 된 게 불쌍해 보이지 않았을까. 프로그램마다 ‘울려고 내가 왔나’를 한 번씩 틀어줬는데 금세 폭발적인 반응이 왔다. 레코드 가게가 많던 서울 청계천이 난리가 났다는 얘기까지 들려왔다.

‘울려고 내가 왔나’는 대성공이었다. 청계천의 음반도매상에게서 ‘울려고 내가 왔나’로 레코드판 제목을 바꾸고 내 이름과 사진을 제일 크게 싣겠다는 연락이 왔다. 가수 남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건 그 곡에서부터였다.

‘연애 0번지’가 금지되지 않았다면 ‘울려고 내가 왔나’가 히트가 됐을까. 작곡가 김영광이 목이 아프지 않았다면 그 곡을 내가 부를 수 있었을까. ‘울려고 내가 왔나’는 연이어 일어난 우연이 만들어 낸 나의 인생곡이었다. 명성을 얻자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다. 야간열차를 타고 대구나 광주에 내려가면 극장 PD를 소개받아 공연했다. 하루가 숨 가쁘게 흘러갔다.

‘울려고 내가 왔나’가 히트하자 다음 곡은 만들기가 어려웠다. 그게 유명 가수의 제일 큰 어려움이 아닐까 싶다. 천재 작곡가로 불리던 박춘석은 1966년 만났다. ‘가슴 아프게’가 박춘석과의 인연으로 나온 것이다. 박춘석을 만난 건 내 삶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다. 이듬해 MBC 신인가수상을 수상했다. 그 후 히트곡을 1년에 두세 곡씩 발표했다. ‘김포가도’ ‘별아 내 가슴에’ ‘너와 나’ ‘우수’ ‘가슴 아프게’ 등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냈다.

당시 팬들은 손뼉 치고 환호하고 그런 게 없었다. 남일해 등 가요 무대에 선 선배들은 모두 점잖은 분들이었다. 춤추는 가수는 팝송을 부르는 가수들뿐이었다. 가요를 부르는 가수들은 춤을 추지 않았다.

‘마음이 고와야지’는 1968년 처음 부른 노래다. 이 곡은 트위스트 느낌의 곡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창법, 무대 액션과 비슷하게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나의 춤과 노래가 전국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때 10대 소녀들이 ‘오빠’라며 나를 보고 환호했다. 소녀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오빠 부대’의 첫 시작이었던 셈이다.

정리=김동우 기자 lov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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